박심문(朴審問)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C2ECBB38B1408X0 |
자(字) | 신숙(愼叔) |
호(號) | 청재(淸齋) |
시호(諡號) | 충정(忠貞) |
생년 | 1408(태종 8) |
졸년 | 1448(세종 30)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밀양(密陽)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박강생(朴剛生) |
[상세내용]
박심문(朴審問)
1408년(태종 8)∼1448년(세종 3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淸齋).
박강생(朴剛生)의 아들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이 되었고, 1436년(세종 18)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주관(記注官)으로 있다가 함길도절도사 김종서(金宗瑞)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야인(野人)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으로 남쪽지방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할 것을 절도사에게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447년에 평안도판관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448년에 도체찰사(道體察使)의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계유정난 때 김종서 등이 살해되자, 크게 분개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밀히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과 내왕하면서 단종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살하였다. 일찍이 세종과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보살펴달라는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박강생(朴剛生)의 아들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이 되었고, 1436년(세종 18)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주관(記注官)으로 있다가 함길도절도사 김종서(金宗瑞)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야인(野人)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으로 남쪽지방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할 것을 절도사에게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447년에 평안도판관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448년에 도체찰사(道體察使)의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계유정난 때 김종서 등이 살해되자, 크게 분개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밀히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과 내왕하면서 단종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살하였다. 일찍이 세종과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보살펴달라는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世祖實錄
正祖實錄
耳溪集
國朝榜目
世祖實錄
正祖實錄
耳溪集
國朝榜目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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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