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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楊治)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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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400(정종 2)
졸년1485(성종 16)
시대조선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무신 > 무신
양천진(楊天震)

[상세내용]

양치(楊治)
1400년(정종 2)∼1485년(성종 16). 본관은 청주(淸州).

고려 조 벽상삼한창국공신(壁上三韓昌國功臣) 양기(楊起)의 후손이다. 부친은 호조판서(戶曹判書) 양천진(楊天震)이고, 관직은 영광군수(靈光郡守)를 거쳐 함길(咸吉)‧황해병마절도사(黃海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아들은 도사(都事) 양순달(楊順達)이며, 증손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부사(府使)를 지내고 조선 전기의 4대 서가 중 한 사람인 양사언(楊士彦)이다.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발탁되어 1437년(세종 19) 김종서가 북방 여진족을 물리칠 때 6진 개척에 큰 공을 세운 충절(忠節)의 무관이다. 1453년(단종 1) 단종(端宗)의 초복(初服)에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 3상신(三相臣)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포천(抱川) 산 속에 숨었다. 단종 손위(遜位)에 미쳐서는 매월 초하루 공복(公服)을 입고 동향(東向)하여 눈물을 비처럼 흘리다가 단종이 승하하자 산문(山門)을 나가지 않고 천주산 아래 기지리(機池里) 두문동(杜門洞)에서 40여 년을 은거하다 86세에 일생을 마쳤다. 시(詩)에 읊기를, ‘세상일 아득히 이미 흰머리 되었는데, 자규루(단종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시를 남겼던 누각)는 천년의 한이 서렸구나. 책명과 무용은 이제 어디에 쓰리오? 다만 돌아가 사육신의 소리 따르길 원하노라[世事茫然已白頭, 千年遺恨子規樓, 策名武勇今何用, 但願歸從六鬼啾]’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1448년(세종 30) 양치(楊治)지영광군사(知靈光軍事)로 있을 때 가벼운 장물죄(臟物罪)를 범하여 고신(告身)을 회수하였다가 갑사(甲士)로 소속시킨 일이 있었다. 저술에 『퇴은실기(退隱實紀)』가 있다. 1626년(인조 4) 충헌사(忠憲祠: 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22번지에 소재)에 배향(配享)되었다. 또한 1691년(숙종 17) 모든 단종 조 충신들의 관작(官爵)이 복권되고 충렬사충신각조사단 등에 268위가 배향(配享)되었는데, 그는 1746년(영조 22)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27번지에 건립된 유허비(遺墟碑) 옆 충목단(忠穆壇)에 사육신 중 한 분인 유응부(兪應孚),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와 함께 모셔져 매년 가을 유림들이 제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人名辭書
朝鮮王朝實錄
梅山集
논산문화원
포천문화원
포천신문
2005.08.31일 기사 수필가 김창종의 포천이야기

[집필자]

김동섭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