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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치신(黃致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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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황동(黃董)
자(字)맹충(孟忠)
시호(諡號)호안(胡安)
생년1397(태조 6)
졸년1484(성종 15)
시대조선전기
본관장수(長水)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황희(黃喜)

[관련정보]

[상세내용]

황치신(黃致身)
1397년(태조 6)∼1484년(성종 1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맹충(孟忠). 초명은 동(董)으로, 태종동중서(董仲舒)가 다시 났다고 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영의정 황희(黃喜)의 아들이다.

태종에게 불려 나가 이름을 하사받은 뒤 음보(蔭補)로 공안부부승(恭安府副丞)이 되었으나, 얼마 뒤 그 이름이 형제들과 맞지 않다 하여 다시 치신이라 고쳐 하사받고, 곧 사재직장에 임명되었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사섬시주부가 되었다가 1415년(태종 15) 통례문봉례랑을 거쳐 감찰이 되고, 곧이어 호조좌랑사온서영(司醞署令)을 역임하였다.

1426년(세종 8) 형조정랑이 되어서는 세도가에서 민간을 잡아다 노비로 만들어 50여년간을 소송하던 적체된 사건을 해결하였다.

이듬해 호조정랑으로 익찬(翊贊)을 겸임하였으며, 곧이어서 판통례문사 겸 상서소윤(判通禮門事兼尙瑞少尹)이 되었다.

1433년에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1435년 예조참의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437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가 곧이어 한성부윤으로 옮겼다. 그의 탁월한 정치능력이 인정되어 경기도도관찰사경창부윤을 거쳐, 형조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444년 호조판서에 승진하여 곧 판한성부사로 옮겼다.

1448년 모친상을 당하여 사임하고, 1452년(문종 2) 부친상을 당하여 거상하였다.

1454년(단종 2) 다시 중추원사에 임명되고, 하성절사(賀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도진무사(都鎭撫使)를 겸하였다.

1457년(세조 3)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곧이어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되었다가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옮겼다.

1461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가 남의 노비를 빼앗은 죄목으로 파직당하였다.

1466년 동지중추부사도총관으로 복관되어 1479년(성종 10)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