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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朴堧)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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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박연(朴然)
자(字)탄보(坦父)
호(號)난계(蘭溪)
시호(諡號)문헌(文獻)
생년1378(우왕 4)
졸년1458(세조 4)
시대조선전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음악 > 음악가
박천석(朴天錫)
조부박시용(朴時庸)
여산송씨(礪山宋氏)
처부송빈(宋贇)
외조부김오(金珸)
출생지충청북도 영동(永同)

[상세내용]

박연(朴堧)
1378년(우왕 4)∼1458년(세조 4). 조선 초기 세종 때의 음악가. 초명은 박연(朴然). 자는 탄보(坦父),(주1)
자(字)
1857년 편찬 『밀성박씨족』 참고.
호는 난계(蘭溪), 송설당(松雪堂). 본관은 밀양(密陽).(주2)
본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난계유고』 참고.
충청북도 영동(永同)에서 태어나 81세로 고향의 고당리(高塘里)에서 죽었다.

할아버지 박시용(朴時庸)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이었으며, 아버지 박천석(朴天錫)이조판서를 지냈다. 모친은 경주 김씨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김오(金珸)의 딸이었으며, 부인은 정경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판서를 지낸 송빈(宋贇)의 딸이었다. 자녀는 3남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박맹우(朴孟愚)현령을 지냈고, 둘째아들 박중우(朴仲愚)군수를 지냈으며, 막내아들 박계우(朴季愚)는 계유정난 직후 정난 주도세력으로부터 교형을 당해 죽었다.

1405년(태종 5)에 생원, 1411년 진사에 등과했으며 그뒤 집현전교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세자시강원문학, 봉상판관 겸 악학별좌(奉常判官兼樂學別坐)관습도감사(慣習都監使)공조참의(工曹參議)중추원사(中樞院使)보문각제조(寶文閣提調)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으며, 특히 율관제작을 통한 편경의 제작은 조선조 초기의 음악 정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세종 때에 어느 정도 음악이 정비되었던 이유는 위로 임금의 뜻이 확고하고 아래로는 박연 같이 악리에 밝은 사람이 있었으며, 더욱이 해주(海州)에서는 거서(秬黍)가 나고 남양(南陽)에서는 경돌이 나는 등 시운(時運)이 들어맞았다고 표현하는 글들이 있듯이, 박연의 음악적 공헌은 시대적 상황과도 적지 않게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순(舜)임금 시대의 유명한 음률가인 기(蘷)에 비견되기도 하는 박연은 편경의 음정을 맞출 정확한 율관(律管)을 제작하기 위하여 수삼차에 걸쳐서 시험제작을 했는가 하면, 흐트러진 악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수십회에 걸친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정확한 율관을 제작하자는 상소문〔請制律管疏〕을 위시해서 제향의 아악을 바로잡자는 글〔請正祀享雅樂疏〕, 축의 제도를 개정하자는 주장〔請改正柷制疏〕, 악현의 제도를 옛 법대로 고치자는 주장〔請樂懸復古制疏〕, 그리고 악보를 간행하자는 상소문〔請印行樂譜疏〕에 이르기까지 무려 39편의 상소문이 『난계유고』에 실려 있다. 이외에도 정초(鄭招), 김진(金鎭) 등과 혼천의(渾天議)를 만드는 등 천문학의 발전에도 기여했다.(주3)
천문학 업적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1433년 6월 9일조("鄭招, 朴堧, 金鎭 등이 새로만든 渾天議를 올렸다.") 참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蘭溪遺藁
世宗朝音樂硏究(張師勛, 서울大學校出版部, 1982)

[집필자]

한명희(韓明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09-11-23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난계유고를 참고하여 본관을 미상에서 밀양으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