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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미수(偰眉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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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천용(天用)
시호(諡號)공후(恭厚)
생년1359(공민왕 8)
졸년1415(태종 15)
시대조선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설손(偰遜)
출신지고창(高昌)

[상세내용]

설미수(偰眉壽)
1359년(공민왕 8)∼1415년(태종 15).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천용(天用).

원래 원나라고창(高昌)사람으로서 고려에 귀화하였다. 숭문감승(崇文監丞) 설손(偰遜)의 아들이며, 설장수(偰長壽)의 아우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401년(태종 1) 판각문사(判閣門事)가 되었다.

그뒤 공조전서(工曹典書)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중군총제(中軍摠制)병조참지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지의정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1403년에는 계품사(啓稟使)로, 1406년에는 성절사로, 이듬해에는 천추사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사은사로 두 차례, 전후 다섯번에 걸쳐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는 그가 중국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인데, 항상 마필이나 금‧은 등 공물의 감면을 주선하여 외교적 성과를 올렸다.

1407년에는 참지의정부사로 재직중 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건의하여 실행하게 하였고, 호조와 공조의 판서를 거쳐, 1410년 예조판서, 이듬해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를 지냈으며, 1414년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

그는 효우(孝友)가 뛰어나 항상 공손하고 근신하였으며, 네 형이 모두 먼저 죽자 어린 조카들을 잘 돌보아 길렀다. 의정부에 재직했을 때는 관대함을 숭상하여 분경(奔競)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호는 공후(恭厚)이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집필자]

박천규(朴天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