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문화(李文和)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BB38D654B1358X0
자(字)백중(伯中)
호(號)오천(烏川)
시호(諡號)공도(恭度)
생년1358(공민왕 7)
졸년1414(태종 14)
시대조선전기
본관인천(仁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심(李深)

[상세내용]

이문화(李文和)
1358년(공민왕 7)∼1414년(태종 14).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백중(伯中), 호는 오천(烏川). 전공판서(典工判書) 이심(李深)의 아들로, 평장사(平章事) 이지저(李之氐)의 6대손이다.

1380년(우왕 6)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우정언우헌납예문응교를 거쳐 경상도안렴사를 지내고, 공양왕우사의를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간의대부에 등용되고 1395년(태조 4) 검교시중직(檢校侍中職)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1397년 좌승지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상서윤을 지냈다.

1399년(정종 1) 생원시를 관장하고 이듬해 첨서의흥삼군부사(簽書義興三軍府事)가 되어 하정사(賀正使)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사평부우사로 등용되었으나 분경(奔競)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경상도도관찰출척사로 외방에 나가고 이어 참찬의정부사사평부우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1405년 예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전라도도체찰사 임무를 대행하고 이어 명나라 황엄(黃儼)접반사가 되었다.

1408년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그해 처녀진헌사(處女進獻使)명나라에 갔다.

1409년 형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민무질사건(閔無疾事件)에 연루, 면직되었다.

1411년 개성유수로 있을 때 저화(楮貨)에 삼사신판(三司申判)대신 호조신판(戶曹申判)이라는 글로 대체할 것을 주장, 시행하게 하였다.

1413년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참찬의정부사가 되고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 장흥금계사(金溪祠), 대구서계서원(西溪書院), 함안도천사(道川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增補文獻備考
大丘邑誌

[집필자]

권인혁(權仁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