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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의(崔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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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258(고종 45)
시대고려후기
본관우봉(牛峰)
활동분야무신 > 무신
최항(崔沆)

[상세내용]

최의(崔竩)
미상∼1258년(고종 45).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자. 본관은 우봉(牛峰).

부친은 최항(崔沆)이며 모친은 송서(宋㥠)의 비(婢)였다.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조용하고 말이 없으며 부끄러움이 많았다. 경림사(景琳師)를 스승으로 섬기고 예기(芮起)에게 시(詩)와 글씨를, 권위(權韙)임익(任翊)에게 정치를, 정세신(鄭世臣)에게 예(禮)를 배웠다.

1255년(고종 42)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고 홍정(紅鞓)을 하사받았다.

1257년에 아버지 이 죽자 야별초(夜別抄)‧신의군(神義軍)‧서방(書房)‧도방(都房)의 옹위(擁衛)를 받아 차장군(借將軍)이 되고 다시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어 집권하게 되었다.

뒤이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판이병부어사대사(判吏兵部御史臺事)가 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집권 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기민(飢民)을 진휼하고 연안택(延安宅)과 정평궁(靖平宮)을 왕부(王府)에 돌리고 가미(家米) 2,570석(石)을 왕실재정을 맡은 내장택(內莊宅)에 바치고 포백(布帛)‧유밀(油蜜)을 대부시(大府寺)에 바쳤으며 또 흉년을 당하여 창고를 풀어 권무대정(權務隊正)과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교위(校尉) 및 방리인(坊里人)을 진휼하였다.

추밀원부사가 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뒤이어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다. 민칭(閔偁)이 몽고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몽고에 있을 때 그곳 대신들이 금후에는 다시 동벌(東伐)하지 않는다고 밀의(密議)하는 것을 들었다.”라고 하므로 기뻐서 집과 쌀, 의류를 주고 산원(散員)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1258년에 와서는 장군 변식(邊軾), 낭장(郞將) 안홍민(安洪敏), 산원 정한규(鄭漢珪) 등을 강화수획사(江華收獲使)로 삼아 약탈을 하는 등 횡포하기 시작하였다.

또 노예는 원래 큰 공이 있어도 전백(錢帛)으로 상을 내리고 관작(官爵)을 주지 않는 것이었으나 앞서 최항이 인심을 얻기 위하여 처음으로 가노(家奴) 이공주(李公柱)최양백(崔良伯)김인준(金仁俊, 金俊)에게 벼슬을 주어 별장을 삼은 바 있었다.

아들인 최의 때에 와서 다시 이공주의 벼슬을 올려 낭장으로 삼았는데 노예로서 참직(參職, 參上職)에 임명하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나이가 젊고 어리석고 용렬하여 현사(賢士)를 예우하지 않았으며 용렬하고 경솔한 무리인 유능(柳能)최양백 등을 가까이 하고, 기근이 들어도 곡식을 내어 진휼하지 않아 크게 인심을 잃었다.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 별장 김인준, 도령낭장(都領郞將) 임연 등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이로써 4대 60여년간에 걸친 최씨무신정권이 끝났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