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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柳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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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장지(藏之)
시호(諡號)문정(文正)
생년1211(희종 7)
졸년1289(충렬왕 15)
시대고려후기
본관문화(文化)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부유공권(柳公權)
공신호추성위사공신(推誠衛社功臣)

[상세내용]

유경(柳璥)
1211년(희종 7)∼1289년(충렬왕 15). 고려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천년(天年) 또는 장지(藏之). 정당문학(正堂文學) 유공권(柳公權)의 손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고종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유천우(兪千遇)와 함께 오랫동안 정방(政房)에 있으면서 특히 최항(崔沆)의 신임을 받았다.

최항이 죽고 그 아들 최의(崔竩)가 뒤를 이어 국정을 한손에 쥐고 행패를 부리는 등 민심을 잃게 되자, 1258년(고종 45) 별장 김준(金俊) 등과 모의하여 최의를 죽이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였다. 최씨무신정권을 타도한 공으로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이 되어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겸임하고 추성위사공신(推誠衛社功臣)에 봉하여졌으며, 그의 고을 유주(儒州: 황해도 文化)감무현(監務縣)에서 영현(令縣)으로 승격되었다.

이때부터 정방을 편전(便殿)에 두고 전주(銓注)를 장악하여 국가의 기무(機務)를 결재하였다.

그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는데, 1259년 고종이 그의 집에서 병사하였다.

1262년(원종 3) 수사도 지문하성사 태자소부(守司徒知門下省事太子少傅)가 되었고, 이듬해 수태부 참지정사 태자태보(守太傅參知政事太子太保)를 거쳐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1269년 대사성 김구(金坵) 등에게 임연(林衍)김준을 죽이고 공신이 된 사실을 비난하였다가 이를 엿들은 환관 김경(金鏡)의 고발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는데, 얼마 뒤 강화로 이배되었다.

1270년 삼별초(三別抄)가 봉기하였을 때 강화도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수중에 들어 있었으나 탈출하여 돌아오니, 그들과 내통할 것을 두려워하던 왕이 크게 기뻐하여 후대하고 평장사 판병부사(平章事判兵部事)로 임명하였다.

이듬해 파직되어 애도(哀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276년(충렬왕 2) 첨의시랑 찬성사 감수국사 판판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監修國史判版圖司事)가 되었는데, 이때 두번이나 무고를 당하였던 김방경(金方慶)을 구하였다.

1278년 찬성사 판전리사사(贊成事判典理司事)에 올라 은퇴할 것을 청하여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말과 웃음이 흡족하고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뛰어나 원부(元傅)허공(許珙) 등이 모두 그의 추천받은 인물이다. 다만, 재물을 많이 모아 한때 삼한(三韓)의 거부로 불리는 등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문장에 뛰어나 신종희종강종고종 등 4대의 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도합 4회에 걸쳐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이존비(李尊庇)안향(安珦)안전(安戩)이혼(李混) 등이 모두 문생(門生)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박옥걸(朴玉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