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공권(鄭公權)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ACF5AD8CB1333X0 |
이명(異名) | 정추(鄭樞) |
자(字) | 공권(公權) |
호(號) | 원재(圓齋) |
시호(諡號) | 문간(文簡) |
생년 | 1333(충숙왕 후2) |
졸년 | 1382(우왕 8)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청주(淸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설곡(雪谷) |
부 | 정포(鄭誧) |
조부 | 정책(鄭㥽) |
저서 | 『원재집(圓齋集)』 |
공신호 | 수성익조공신(輸誠翊祚功臣) |
[상세내용]
정공권(鄭公權)
1333년(충숙왕 복위 2)∼1382년(우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추(樞). 자는 공권(公權)인데, 뒷날 자를 이름으로 썼다. 호는 원재(圓齋).
조부는 판선공(辦繕公)정책(鄭㥽)이고, 부친은 설곡(雪谷) 정포(鄭誧)이다.1353년(공민왕 2)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지공거(知貢擧)로 한 과거에 급제한 이후 예문검열(藝文檢閱) 및 여러 관직을 거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올랐다. 1366년(공민왕 15)에 인척인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의 죄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큰 고초를 당하였다. 신돈은 반대파 숙청을 위한 무고의 기회로 삼으려 거짓 자백을 강요했으나 정추는 폭압적 문초에도 굴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하고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가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발탁되었다. 이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우왕 즉위 후 좌대언‧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는데, 1376년(우왕 2) 태(胎)를 예안현(禮安縣)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뒤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받고, 수성익조공신(輸誠翊祚功臣)에 올랐다. 성품이 공검하고 근후하여 관직에 있을 때 항상 정도를 행하였다. 당시 가묘제도(家廟制度)가 폐지되었으나, 제기를 별실에 간직하여두고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손수 씻어서 제사에 쓰도록 하였다.
나라의 일이 권신의 손에 좌우되는 것을 한탄하다가 고려 멸망 10년 전인 1382년에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원재집(圓齋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의 학문적 연원은 이제현에 잇닿아 있다. 그는 문생으로서 “어릴 때부터 공경하며 역옹(櫟翁)을 섬겼다”고 하였는데, 당대의 병폐를 바로잡고 새로운 문풍을 진작시키려 했던 익재의 사상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익재의 영향은 그의 시문에 내용과 성격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는 이곡(李穀)과 돈독한 교유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러한 관계는 선대의 인연을 이은 것으로 정포와 이곡 역시 돈독한 교류가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신뢰를 바탕으로 수십 년간을 교류하였는데, 시적 교류 역시 왕성하여 그들의 시문집에는 서로 화운한 시편이 상당수에 이른다. 한수(韓修)는 정추와는 동갑이며 인척관계였다. 그는 문재로 이름이 있었고,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한 당대의 명필이었다.
정추는 당시 국권을 전횡하며 사회악을 빚어내던 권문세족 및 부원배(俯元輩)와 대립하던 전형적인 여말 사대부였다. 그에 대하여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는 “항상 권간들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것을 미워하고 분개하여 마음에 불평을 가지고 있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의 치열했던 정치의식은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정치적 핍박을 받았던 부친이나 좌주 이제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변(變)’에 대한 중시라는 그 자신의 진보적인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물이란 무형에서 생겨나 형(形)에 얽매이게 된다. 형에 얽매인다면 변하기 어렵다. 변하기 어렵게 되면 리(理)에 모자람이 있게 된다. 나는 무형을 주장하여 그 변을 숭상하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정추가 자신을 ‘무형자(無形子)’로 자호하고, 호에 ‘원(圓)’자를 쓴 이유도 바로 변의 추구에 있다. 고착화된 상태를 부정해야만 변화가 가능하며, 마치 수레바퀴처럼 둥글어야 장애를 돌파하며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를 이치상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실현하고자 할 때,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한 첨예한 대립은 필연적인 것이다.
조부는 판선공(辦繕公)정책(鄭㥽)이고, 부친은 설곡(雪谷) 정포(鄭誧)이다.1353년(공민왕 2)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지공거(知貢擧)로 한 과거에 급제한 이후 예문검열(藝文檢閱) 및 여러 관직을 거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올랐다. 1366년(공민왕 15)에 인척인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의 죄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큰 고초를 당하였다. 신돈은 반대파 숙청을 위한 무고의 기회로 삼으려 거짓 자백을 강요했으나 정추는 폭압적 문초에도 굴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하고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가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발탁되었다. 이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우왕 즉위 후 좌대언‧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는데, 1376년(우왕 2) 태(胎)를 예안현(禮安縣)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뒤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받고, 수성익조공신(輸誠翊祚功臣)에 올랐다. 성품이 공검하고 근후하여 관직에 있을 때 항상 정도를 행하였다. 당시 가묘제도(家廟制度)가 폐지되었으나, 제기를 별실에 간직하여두고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손수 씻어서 제사에 쓰도록 하였다.
나라의 일이 권신의 손에 좌우되는 것을 한탄하다가 고려 멸망 10년 전인 1382년에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원재집(圓齋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의 학문적 연원은 이제현에 잇닿아 있다. 그는 문생으로서 “어릴 때부터 공경하며 역옹(櫟翁)을 섬겼다”고 하였는데, 당대의 병폐를 바로잡고 새로운 문풍을 진작시키려 했던 익재의 사상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익재의 영향은 그의 시문에 내용과 성격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는 이곡(李穀)과 돈독한 교유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러한 관계는 선대의 인연을 이은 것으로 정포와 이곡 역시 돈독한 교류가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신뢰를 바탕으로 수십 년간을 교류하였는데, 시적 교류 역시 왕성하여 그들의 시문집에는 서로 화운한 시편이 상당수에 이른다. 한수(韓修)는 정추와는 동갑이며 인척관계였다. 그는 문재로 이름이 있었고,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한 당대의 명필이었다.
정추는 당시 국권을 전횡하며 사회악을 빚어내던 권문세족 및 부원배(俯元輩)와 대립하던 전형적인 여말 사대부였다. 그에 대하여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는 “항상 권간들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것을 미워하고 분개하여 마음에 불평을 가지고 있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의 치열했던 정치의식은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정치적 핍박을 받았던 부친이나 좌주 이제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변(變)’에 대한 중시라는 그 자신의 진보적인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물이란 무형에서 생겨나 형(形)에 얽매이게 된다. 형에 얽매인다면 변하기 어렵다. 변하기 어렵게 되면 리(理)에 모자람이 있게 된다. 나는 무형을 주장하여 그 변을 숭상하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정추가 자신을 ‘무형자(無形子)’로 자호하고, 호에 ‘원(圓)’자를 쓴 이유도 바로 변의 추구에 있다. 고착화된 상태를 부정해야만 변화가 가능하며, 마치 수레바퀴처럼 둥글어야 장애를 돌파하며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를 이치상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실현하고자 할 때,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한 첨예한 대립은 필연적인 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이희덕(李熙德)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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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