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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희(閔曦)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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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고려후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군인 > 장수

[상세내용]

민희(閔曦)
생졸년 미상. 고려 고종 때의 재상(宰相)이며 대장군(大將軍). 본관은 여흥(驪興).

1231년(고종 18) 몽고군이 침입하자 북계분대어사(北界分臺御史)가 되어 적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하여해 적진에 갔다.

이때 몽고의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는 스스로 권황제(權皇帝)라 칭하고 전려(氈廬: 毛布의 天幕)에 앉아서 금수(錦繡)로써 장식, 부인을 좌우에 나열시키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지키려면 지켜 보고, 항복하려면 항복하고, 싸우려면 싸워보되 속히 결정하라.”라고 하자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뒤 내시시랑(內侍侍郞) 송국첨(宋國瞻)과 함께 또 몽고군 진영에 다녀왔고 그해 12월 몽고군이 개성을 포위하고 흥왕사(興王寺)를 공격하자 몽고군 진영에 다시 화친을 청하고 몽고사신 2인과 함께 돌아왔다.

1232년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왕명을 받고 몽고에 항전을 지속하던 구주(龜州: 지금의 龜城)수장병마사(守將兵馬使) 박서(朴犀) 등을 권유하여 몽고에 항복하게 하였다.

그해 대장군으로 서경순무사(西京巡撫使)가 되어 몽고가 서경(西京)에 설치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살해하려고 하였는데, 서경 사람들이 몽고의 보복이 두려워 그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233년 북계병마사로 있을 때 서경낭장(西京郞將) 홍복원(洪福源)과 서경인(西京人) 필현보(畢賢甫)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최우(崔瑀)의 가병(家兵) 3,000을 이끌고 이를 토벌, 서경이 폐허가 되었다.

뒤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가 되었는데, 1249년 최우가 죽고 그뒤를 이어 집권한 최항(崔沆)에 의하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경손(金慶孫)과 함께 섬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평소 김경손과 함께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은 것이 최항의 미움을 받아 화를 입게 된 것이다.

그뒤 추밀원사(樞密院使)가 되었으며, 죽은 뒤 1258년 나라에 공이 있었다 하여 김경손과 함께 처자(妻子)에게 각각 은(銀) 1근과 쌀 3석(石)씩이 하사되었고, 1298년(충렬왕 24) 나라에 공이 있었다 하여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전교(傳敎)를 내려 내외손(內外孫) 가운데서 초직(初職)에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