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첨(宋國瞻)
[상세내용]
송국첨(宋國瞻)
미상∼1250년(고종 37). 고려의 문신. 진주(鎭州) 사람. 과거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
1226년(고종 13) 금나라의 장수 우가하(于哥下)가 침입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우군장(右軍將)이 되어, 김희제(金希磾)‧손습경(孫襲卿)과 함께 보기(步騎) 1만여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우가하를 물리치고 개선하였다.
정언을 거쳐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가 된 뒤 정방에 들어갔으나 아부함이 없이 원칙을 지키려 했으므로 최이(崔怡)가 좋아하지 않았다. 뒤에 박훤(朴萱)이 권세를 크게 부리자 정방을 떠났다.
1231년 몽고가 침입하자 회안공(淮安公) 정(侹)을 따라 살리타이(撒禮塔)와 강화를 체결하는데 공이 있었다.
형부상서로 경상도순문사로 나갔을 때 송광사의 중으로 국가와 백성에게 막대한 폐해를 끼치던 만전(萬全: 崔瑀의 서자로 이름은 沆)을 탄핵하여 그들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그러나 곧 최항의 참소로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좌천되었고, 1249년 최항이 집권하자 우산기상시를 거쳐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事)로 좌천된 뒤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분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책임감이 강한 유능한 관리였다 한다.
1226년(고종 13) 금나라의 장수 우가하(于哥下)가 침입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우군장(右軍將)이 되어, 김희제(金希磾)‧손습경(孫襲卿)과 함께 보기(步騎) 1만여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우가하를 물리치고 개선하였다.
정언을 거쳐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가 된 뒤 정방에 들어갔으나 아부함이 없이 원칙을 지키려 했으므로 최이(崔怡)가 좋아하지 않았다. 뒤에 박훤(朴萱)이 권세를 크게 부리자 정방을 떠났다.
1231년 몽고가 침입하자 회안공(淮安公) 정(侹)을 따라 살리타이(撒禮塔)와 강화를 체결하는데 공이 있었다.
형부상서로 경상도순문사로 나갔을 때 송광사의 중으로 국가와 백성에게 막대한 폐해를 끼치던 만전(萬全: 崔瑀의 서자로 이름은 沆)을 탄핵하여 그들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그러나 곧 최항의 참소로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좌천되었고, 1249년 최항이 집권하자 우산기상시를 거쳐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事)로 좌천된 뒤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분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책임감이 강한 유능한 관리였다 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박창희(朴菖熙)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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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