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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文益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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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일신(日新)
호(號)삼우당(三憂堂)
시호(諡號)충선(忠宣)
생년1329(충혜왕 1)
졸년1398(태조 7)
시대고려후기
본관단성(丹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문숙선(文淑宣)
출생지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상세내용]

문익점(文益漸)
1329년(충혜왕 1)∼1398년(태조 7). 고려말의 문신‧학자. 첫 이름은 문익첨(文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본관은 단성(丹城).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출생.

문숙선(文淑宣)의 아들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禀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최유원나라의 군사 1만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하여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의 제지를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다.

처음은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를 퍼지게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정천익과 더불어 문익점의 목화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공로는 참으로 컸다. 그 공을 기리어 조식(曺植)은 후일 문익점의 공로를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라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는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문익점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문익점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사후 조선태종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되었고, 1440년(세종 22) 영의정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그의 고향 단성도천서원(道川書院)전라남도 장흥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또, 문익점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재배하였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고, 여기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있으며 이 책은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木棉花記
三憂堂實記
農林水産古文獻備要(金榮鎭,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2)

[집필자]

박성래(朴星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4-11석탄집(石灘集)을 참고하여 본관을 남평(南平)에서 단성(丹城)으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