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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수(李公遂)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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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남촌(南村)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308(충렬왕 34)
졸년1366(공민왕 15)
시대고려후기
본관익산(益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부이행검(李行儉)
공신호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

[상세내용]

이공수(李公遂)
1308년(충렬왕 34)∼1366년(공민왕 15). 고려의 문신. 본관은 익산(益山).

언부전서(讞部典書) 이행검(李行儉)의 손자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매부인 김공의(金公義) 집에서 자랐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으면서 문과에 급제하여 전의주부(典儀注簿)가 되고, 여러 번 옮겨 전교부령(典校副令)에 올랐다.

1344년(충목왕 즉위) 서연관(書筵官)이 설치되면서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왕을 시강(侍講)하였고, 다음해 지신사(知申事)로서 찬성사(贊成事) 박충좌(朴忠佐)김영후(金永煦), 참리(參理) 신예(辛裔)와 더불어 정방(政房)제조관(提調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감찰대부판밀직사사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하였으며, 공민왕삼사우사(三司右使)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어 찬성사에 오르고, 정동행성(征東行省)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므로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하므로 평장사죽전(竹田)에 나아가 둔을 쳤으나, 적이 개경을 핍박하므로 돌아와서 왕을 따라 남행(南幸)하였다.

이듬해 홍건적이 평정되고, 국왕이 환도하기 이전 참정 황상(黃裳), 추밀원사 김희조(金希祖)와 같이 개경을 지키게 하였는데, 재주를 헤아려서 관직을 맡기고 방략(方略)을 지시하여 유민을 편안히 안정시키며 생도를 가르치고 길렀다.

1363년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므로, 밀직제학 허강(許綱)과 함께 진정표(陳情表)를 가지고 가서 공민왕의 복위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使)로서 그대로 원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이해 3월 본국으로부터 좌정승에 임명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덕흥군우정승에 임명되었다는 통역관 이득춘(李得春)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1364년 원나라 병사 1만명으로 덕흥군을 받들고 귀국하던 최유(崔濡)고려의 군사에게 대패한 뒤, 또다시 대병력을 이끌고 귀국하려 하자 홍순(洪淳)허강이자송(李子松)김유(金庾)황대두(黃大豆)장자온(張子溫)임박(林樸) 등과 함께 그 사실을 밀서로 정량(鄭良)송원(宋元)으로 하여금 본국에 보고하게 한 결과, 이득춘의 보고가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밝혀져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제수되고,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를 받았다.

이해 공민왕의 왕위가 회복되었으므로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국학(國學)을 수리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여 원나라 왕에게서 받은 금대(金帶)를 풀어 그 비용에 충당하였다.

이때 정권을 잡은 신돈(辛旽)이 시기하므로 관직에서 물러나 덕수현(德水縣)의 농장으로 내려가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 자칭하고, 한가롭게 지냈다.

1365년 익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성품이 깨끗하여 작은 것이라도 함부로 주고받지 않았으며, 일에 임해서는 강하고 의연하여 형세에 어려워하는 것이 없었다.

1376년(우왕 2)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이희덕(李熙德)

명 : "공수(公遂)"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4李公遂行儉孫監察崖子戊申生號南村忠惠庚辰文壯奸臣崔濡在元㳟愍遭廢公遂奉表如京師謁太祖廟誓曰吾君不復位臣死不復来公遂奇后之內兄也見后至誠陳奏甲辰復王位械崔濡以送公遂始還元
紀年便攷v4愍遭廢公遂奉表如京師謁太祖廟誓曰吾君不復位臣死不復来公遂奇后之內兄也見后至誠陳奏甲辰復王位械崔濡以送公遂始還元朝識者莫不嗟賞忠節公遂精明謹慎果断剛毅一毫不妄取予臨事不為權勢所窘時辛旽當國頗忌公遂名望公遂亦
紀年便攷v4送公遂始還元朝識者莫不嗟賞忠節公遂精明謹慎果断剛毅一毫不妄取予臨事不為權勢所窘時辛旽當國頗忌公遂名望公遂亦以盛滿自戒寘别墅於德水縣幅巾藜杖嘯咏其中風流閑雅蕭然有山野之趣是以免於禍早喪母事妹如事母及疾親戚謂
紀年便攷v4誓曰吾君不復位臣死不復来公遂奇后之內兄也見后至誠陳奏甲辰復王位械崔濡以送公遂始還元朝識者莫不嗟賞忠節公遂精明謹慎果断剛毅一毫不妄取予臨事不為權勢所窘時辛旽當國頗忌公遂名望公遂亦以盛滿自戒寘别墅於德水縣幅巾
紀年便攷v4孫監察崖子戊申生號南村忠惠庚辰文壯奸臣崔濡在元㳟愍遭廢公遂奉表如京師謁太祖廟誓曰吾君不復位臣死不復来公遂奇后之內兄也見后至誠陳奏甲辰復王位械崔濡以送公遂始還元朝識者莫不嗟賞忠節公遂精明謹慎果断剛毅一毫不妄
紀年便攷v4械崔濡以送公遂始還元朝識者莫不嗟賞忠節公遂精明謹慎果断剛毅一毫不妄取予臨事不為權勢所窘時辛旽當國頗忌公遂名望公遂亦以盛滿自戒寘别墅於德水縣幅巾藜杖嘯咏其中風流閑雅蕭然有山野之趣是以免於禍早喪母事妹如事母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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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