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취려(金就礪)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CDE8B824D1234X0
시호(諡號)위열(威烈)
생년1172(명종 2)
졸년1234(고종 21)
시대고려중기
본관언양(彦陽)
활동분야무신 > 무신
김부(金富)

[상세내용]

김취려(金就礪)
1172년(명종 2)(주1)
생년
[김취려묘지명(金就呂墓誌銘)]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갑오년(고종 21, 1234) 2월 ■4일에 병이 들었는데 21일이 되자 급하게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를 참고.
∼1234년(고종 21).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언양(彦陽).

부친은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金富)이다.

음서로 정위(正衛)가 되어 동궁위(東宮衛)에 배속되었으며, 이후 장군이 되어 동북계를 맡아 지켰고, 대장군에 발탁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몽고가 일어나 중국 화북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금나라를 정벌했고, 의 지배하에 복속하고 있던 거란이 반기를 들어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그런데 거란 또한 몽고의 공격을 받아 형세가 불리해지자 1216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이때 그는 대장군으로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朝陽鎭)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또, 연주(延州)에 이르러서는 거란 군사가 강성하여 모두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더불어 앞장서서 적군의 포위를 돌파하여 그에 힘입은 군사들이 적군을 무찔러 목베고 사로잡은 군사들이 2천4백명이나 되어, 거란은 드디어 청새진(淸塞鎭)을 넘어서 퇴거하였다. 이 전투에서 맏아들이 전사하였다.

1217년 거란군 5천여명이 다시 남으로 내려오자, 금교역(金郊驛: 지금의 瑞興)에서 5군을 재편성하여 상장군 오응부(吳應夫)중군병마사, 상장군 최원세(崔元世)전군병마사, 차상장군(借上將軍) 공천원(貢天源)좌군병마사 등으로 삼았다.

그러나 5군이 출발을 지체할 사이에 거란이 동주(東州: 지금의 鐵原)를 함락시키자, 당시의 집정자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상장군으로 전군병마사에 임명되어, 거란 군사를 명주(溟州: 지금의 江陵)방면으로 패주시켰다.

그해 다시 거란이 여진족과 연합하여 침입하자 예주(豫州: 咸鏡南道 定平)에서 교전하였으나 병으로 돌아왔으며, 1218년 거란이 또다시 침입하므로 병마사가 되어 서북면원수 조충(趙沖)과 함께 적을 강동성(江東城)으로 쫓아냈다.

이때 동진국(東眞國)을 쳐서 신하로 따를 것을 맹세하게 하고, 함께 거란을 토멸하겠다는 명분으로 고려동북면 지방으로 들어와 공동작전을 제의한 몽고군과 그리고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1219년에는 의주별장 한순(韓恂)낭장 다지(多智) 등의 반란을 이극서(李克偦)이적유(李迪儒)와 더불어 평정하여 북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는 많은 공을 세워 1221년에는 추밀원사 병부상서 판삼사사(樞密院使兵部尙書判三司事)가 되었으며,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를 거쳐 1228년에는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으며, 그뒤 시중에 제수되었다.

사람됨이 정직, 검약하였으며, 군사통제에 엄격하고 공정하여서, 사졸들이 추호의 범함도 없었고, 존경하였다. 일찍이 많은 공을 세웠으나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 칭찬의 소리가 높았다.

또한, 정승이 되어서는 안색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려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고종묘정(高宗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이정신(李貞信)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