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응부(吳應夫)
[상세내용]
오응부(吳應夫)
미상∼1224년(고종 11). 고려 고종 때의 무신‧재상. 일명 응부(應富).
1199년(신종 2) 명주(溟州: 강릉)‧동경(東京: 경주)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낭장으로서 명주에 파견되어 이를 진압하였다.
그뒤 승진을 거듭하여 상장군에 올랐으며, 1216년(고종 3)에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중군(中軍)‧우군(右軍)‧후군(後軍)의 3군을 구성할 때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가 되었다. 다음해에 고려군이 태조탄(太祖灘: 박천)에서 크게 패하고 거란군이 금교역(金郊驛: 瑞興)에까지 이르자 다시 5군을 편성하였는데, 이때 중군병마사가 되어 5군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이 적성(積城: 연천)에 있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이곳을 공격하였다가 동주(東州: 철원)를 빼앗겼으므로,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참지정사(參知政事)에까지 올랐다가 1224년에 죽었다.
1199년(신종 2) 명주(溟州: 강릉)‧동경(東京: 경주)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낭장으로서 명주에 파견되어 이를 진압하였다.
그뒤 승진을 거듭하여 상장군에 올랐으며, 1216년(고종 3)에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중군(中軍)‧우군(右軍)‧후군(後軍)의 3군을 구성할 때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가 되었다. 다음해에 고려군이 태조탄(太祖灘: 박천)에서 크게 패하고 거란군이 금교역(金郊驛: 瑞興)에까지 이르자 다시 5군을 편성하였는데, 이때 중군병마사가 되어 5군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이 적성(積城: 연천)에 있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이곳을 공격하였다가 동주(東州: 철원)를 빼앗겼으므로,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참지정사(參知政事)에까지 올랐다가 1224년에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이익주(李益柱)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