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조충(趙冲)

[요약정보]

UCIG002+AKS-KHF_12C870CDA9FFFFB1171X0
자(字)담약(湛若)
시호(諡號)문정(文正)
생년1171(명종 1)
졸년1220(고종 7)
시대고려중기
본관횡성(橫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영인(趙永仁)

[상세내용]

조충(趙冲)
1171년(명종 1)∼1220년(고종 7). 고려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담약(湛若). 시중(侍中) 조영인(趙永仁)의 아들이다. 음서(蔭敍)로 벼슬에 올라 태학(太學)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명종 때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임명되었다.

1209년(희종 5)에 국자좨주(國子祭酒), 1211년에는 대사성 한림학사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임하고 동북면병마사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쳐 1216년(고종 3)에는 문무를 겸비하였다 하여 추밀부사 한림학사승지(樞密副使翰林學士承旨)로서 상장군을 겸임하였다.

이해에 거란군이 북방에 침입하자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叔瞻)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가 되었는데 이 휘하의 부원수로서 경도인(京都人)가운데 종군가능자와 승군(僧軍)을 모아 출정하였다.

이듬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방보(鄭邦輔)로 원수가 교체된 뒤 염주(鹽州)에서 적병을 물리쳤으나, 안주 태조탄(太祖灘)까지 추격하였다가 패배하여 파직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여진족의 황기자군(黃旗子軍)이 압록강을 건너 인주(麟州)용주(龍州)정주(靜州) 등지의 경계내에 침입하자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이를 대파하고, 그 공으로 파면 이전의 관작으로 복직되었다.

1218년에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되어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거란족의 침입이 날로 심하고 관군이 유약하여 복속시키지 못하자, 다시 서북면원수가 되어 김취려(金就礪)정통보(鄭通寶) 등을 인솔하고 출정, 거란군을 대파하니 이에 거란군이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 웅거하게 되었다.

이듬해 몽고‧동진(東眞)군과 연합하여 강동성을 공격, 거란군의 항복을 받고 몽고군 원수인 합진(哈眞)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뒤 개선하여 정당문학 판예부사(政堂文學判禮部事)에 오르고, 곧이어 수태위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수국사(守太尉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修國史)가 더하여졌다.

그가 죽자 3일간 조회를 철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이 추증되고,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임영정(林英正)
대표명조충(趙冲)
성명조충(趙沖), 조충(趙冲)

성명 : "조충(趙沖)"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5-10고려문과방목을 참고하여 본관을 횡천(橫川)에서 횡성(橫城)으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