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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景文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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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응렴(金膺廉)
이명(異名)김의렴(金疑廉)
시호(諡號)경문(景文)
생년?(미상)
졸년875(신라: 경문왕 15, 헌강왕 1/발해: 대현석 5)
시대통일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
김계명(金啓明)
광화부인(光和夫人)
조모문목부인 김씨(文穆夫人 金氏)
영화부인 김씨(寧花夫人 金氏)

[상세내용]

경문왕(景文王)
미상∼875년. 신라 제48대왕. 재위 861∼875년. 성은 김씨, 이름은 김응렴(金膺廉), 혹은 김의렴(金疑廉).

부친은 김계명(金啓明)이며, 모친은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이며, 할머니는 충공(忠恭)의 딸인 문목부인(文穆夫人) 김씨이고, 왕비는 헌안왕의 큰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또, 뒤에 헌안왕의 작은 딸도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김황(金晃: 정강왕)김정(金晸: 헌강왕)김윤(金胤)이고, 딸은 김만(金曼: 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 김위홍(金魏弘)이 있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範敎師: 삼국사기에는 興輪寺僧이라고 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으므로, 낭도 중에는 승려가 많았다.

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다.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경문왕은 불교와 아울러 국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문왕의 관심은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邀元郞)예흔랑(譽昕郞)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은근히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舍知)심필(心弼)을 시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현금포곡(玄琴抱曲)」‧「대도곡(大道曲)」‧「문상곡(門詳曲)」 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즉위 초 861년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862년 이찬(伊飡) 김정(金正)상대등으로, 아찬(阿飡) 위진(魏珍)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김계명의공대왕(懿恭大王), 어머니 광화부인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 왕비를 문의왕비(文懿王妃)로 봉하고 왕자 김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치국에 임하였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允興)과 그 동생 숙흥(叔興)계흥(季興)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金銳)김현(金鉉) 등의 모반, 874년 근종(近宗)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그러나 경문왕은 하대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잠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의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0, 1980)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