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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수(鄭鳳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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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상수(祥叟)
시호(諡號)양무(襄武)
생년1572(선조 5)
졸년1645(인조 23)
시대조선중기
본관하동(河東)
활동분야무신 > 무신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봉수(鄭鳳壽)
1572년(선조 5)∼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의 무신‧의병장.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상수(祥叟).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하던 공부를 포기하고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부장(部將)이 되었으며,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감찰영산현감을 지냈다.

1605년(선조 38) 무안현대장으로 흑산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를 참획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4,000여명의 의병을 모집, 출신(出身) 김종민(金宗敏)중군(中軍)으로 삼고 미곶첨사(彌串僉使) 장사준(張士俊)이광립(李光立) 등과 함께 정예병을 양성하며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때 용골산성(龍骨山城)에는 철산(鐵山)의주 등지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고립된 이 성을 지킬 수 없다 하여 평안도관찰사로 하여금 난민들을 산속으로 피신하게 하여 전멸의 화를 입지 않게 하려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봉수 등이 이 성을 고수할 것을 결의하자 조정에서 그에게 당상계(堂上階)를 주어 전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그는 적에게 투항한 장사준 등을 참수하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용골산성에서 많은 후금군을 살해하고 포로가 된 수천명의 백성을 구출, 그 공으로 철산부사가 되었으며, 이어 가선계(嘉善階)에 올라 용천부사 겸 조방장(龍川府使兼助防將)이 되었다. 곧 방어사(防禦使)의주부윤을 겸직하고, 적이 철수한 뒤 구성부사개천군수오위장이 되었다.

1630년 부총관으로 전라좌수사에 특제(特除)되었고, 이듬해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계하였다. 이어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가 되었으며, 1634년 전라도병마절도사,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부총관 겸 훈련도정을 역임하였다.

철산충무사(忠武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增補文獻備考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