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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명(李徵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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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상(伯祥)
생년1648(인조 26)
졸년1699(숙종 25)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의(全義)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만웅(李萬雄)

[상세내용]

이징명(李徵明)
1648년(인조 26)∼1699년(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백상(伯祥). 황해도관찰사 이만웅(李萬雄)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74년(현종 15)이른바 갑인예송이 벌어지고 송시열을 죽이라는 탄핵이 빗발쳤을 때 감히 변호하려는 사람들이 없자 직접 제생을 모아 항소를 올렸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송시열덕원부로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도원찰방(桃源察訪)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168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조병조좌랑을 거쳐 삼사에 들어가 정언부수찬지평 등을 지냈다.

1686년 7월 부교리로 있으면서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어머니를 비롯한 외척들의 궁궐출입에 대한 비위사실을 극간하고, 희빈 장씨를 쫓아내어 여총(女寵)의 화를 막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많은 조신들이 죽거나 유배되었는데, 이때 남해로 유배되었다.

1694년 4월 적거(謫居)6년 만에 갑술옥사가 일어나고 희빈 장씨가 쫓겨나자 귀양에서 풀려 돌아왔다. 다시 관직에 기용되어 수찬이조정랑응교집의부승지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내고, 1695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나갔다.

그때 마침 흉년을 만나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하는 형편이었는데, 그는 지방관리의 녹봉지급을 파하고 어장세(漁場稅)를 금지시켜 모든 이익을 민간에게 베풀어 굶주린 난민들을 구휼하였으며, 그밖에도 여러모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도민이 크게 기뼈하여 백년 이래 으뜸가는 선치라고 칭찬하였다.

그뒤 판결사가 되었다가 다시 이조참의대사간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사송(詞訟)을 올바르게 처리하고 불법 호활(豪猾)한 무리들을 가차없이 처벌, 단속하였으며, 오랜 민원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 성망(聲望)이 높았다.

그뒤 예조형조참판대사성 등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1646년 경기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人物志
宋子大全

[집필자]

홍순만(洪淳晩)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