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구(河在九)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558C7ACAD6CB1832X0 |
자(字) | 치백(致伯) |
호(號) | 위수(渭叟) |
생년 | 1832(순조 32) |
졸년 | 191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진양(晉陽)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하석문(河錫文) |
조부 | 하필명(河必明) |
증조부 | 하성원(河聖源) |
고조부 | 하한윤(河漢潤) |
처부 | 정선전씨(旌善全氏) |
외조부 | 정효맹(鄭孝孟) |
묘소 | 화장산(花長山) 남산동(南山洞) |

[상세내용]
하재구(河在九)
1832년(순조 32)∼1911년.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치백(致伯)이고, 호는 위수(渭叟)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고조부는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하한윤(河漢潤), 증조부는 증승정원좌승지 겸 경연관참찬관(贈承政院左承旨兼經筵官參贊官) 하성원(河聖源), 조부는 증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贈戶曹參判同知義禁府事) 하필명(河必明), 부친은 노직(老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른 진사(進士) 하석문(河錫文)이다. 외조부는 동래정씨(東萊鄭氏) 정효맹(鄭孝孟)이며, 처부는 정선전씨(旌善全氏)이다.
하재구는 12, 3세 때 이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독파하고 그 외 과거 공부에 필요한 잡문을 익혔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문정공(文貞公) 김세균(金世均: 1812∼1879)을 만났다.
1861년(철종 12)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10위로 합격하였다. 같은 해 대구백(大邱伯) 김명진(金明鎭)의 천거로 효력부위(效力副尉)가 되었으며, 친군영군사마(親軍營軍司馬)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 승직하였다. 김명진은 중앙직으로 들어오면서 하재구를 크게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돌아오는 도중 김명진은 사망하고, 하재구 또한 부친상을 당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고종이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除授)하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묘소는 화장산(花長山) 남산동(南山洞)에 있다.
고조부는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하한윤(河漢潤), 증조부는 증승정원좌승지 겸 경연관참찬관(贈承政院左承旨兼經筵官參贊官) 하성원(河聖源), 조부는 증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贈戶曹參判同知義禁府事) 하필명(河必明), 부친은 노직(老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른 진사(進士) 하석문(河錫文)이다. 외조부는 동래정씨(東萊鄭氏) 정효맹(鄭孝孟)이며, 처부는 정선전씨(旌善全氏)이다.
하재구는 12, 3세 때 이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독파하고 그 외 과거 공부에 필요한 잡문을 익혔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문정공(文貞公) 김세균(金世均: 1812∼1879)을 만났다.
1861년(철종 12)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10위로 합격하였다. 같은 해 대구백(大邱伯) 김명진(金明鎭)의 천거로 효력부위(效力副尉)가 되었으며, 친군영군사마(親軍營軍司馬)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 승직하였다. 김명진은 중앙직으로 들어오면서 하재구를 크게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돌아오는 도중 김명진은 사망하고, 하재구 또한 부친상을 당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고종이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除授)하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묘소는 화장산(花長山) 남산동(南山洞)에 있다.
[참고문헌]
渭叟先生文集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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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