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직(韓師直)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55CC0ACC9C1B1695X0 |
자(字) | 여온(汝溫) |
시호(諡號) | 공간(恭簡) |
생년 | 1695(숙종 21) |
졸년 | 1778(정조 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청주(淸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한배연(韓配淵) |
생부 | 한배후(韓配厚) |

[관련정보]
[상세내용]
한사직(韓師直)
1695년(숙종 21)∼1778년(정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온(汝溫). 한배후(韓配厚)의 아들로, 한배연(韓配淵)에게 입양되었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21년(경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벼슬길로 나아가 1740년(영조 16) 정선군수를 거쳐 정랑에 올랐다.
175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60세의 나이로 보덕이 되었고, 이어 지평‧정언‧헌납‧장령을 역임하였다. 강릉부사로 재직 중이던 1756년 관동지방에 대기근이 들자 녹봉에서 구휼미를 내는 등 성력(誠力)을 다하여 진휼에 힘써 수천명의 기민(飢民)을 구하였으며, 그 치적을 인정받아 동부승지가 되었다.
1763년 대사간에 올랐고, 경연관으로서 경연에 불참하였다 하여 원주목(原州牧)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 다시 대사간이 특수(特授)되었고, 다시 대사헌을 지냈다.
이어 한성판윤을 거쳐 8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는 등 영조로부터 우로(優老)의 은전을 입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1721년(경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벼슬길로 나아가 1740년(영조 16) 정선군수를 거쳐 정랑에 올랐다.
175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60세의 나이로 보덕이 되었고, 이어 지평‧정언‧헌납‧장령을 역임하였다. 강릉부사로 재직 중이던 1756년 관동지방에 대기근이 들자 녹봉에서 구휼미를 내는 등 성력(誠力)을 다하여 진휼에 힘써 수천명의 기민(飢民)을 구하였으며, 그 치적을 인정받아 동부승지가 되었다.
1763년 대사간에 올랐고, 경연관으로서 경연에 불참하였다 하여 원주목(原州牧)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 다시 대사간이 특수(特授)되었고, 다시 대사헌을 지냈다.
이어 한성판윤을 거쳐 8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는 등 영조로부터 우로(優老)의 은전을 입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典故大方
藥坡漫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典故大方
藥坡漫錄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대표명 | 한사직(韓師直) |
성명 | 한사직(韓師直) |
성명 : "한사직(韓師直)"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