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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보(鄭熙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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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욱(仲旭)
호(號)퇴성헌(退省軒)
생년1683(숙종 9)
졸년1763(영조 39)
시대조선중기
본관초계(草溪)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하주(鄭廈柱)
안동김씨(安東金氏)
외조부김윤중(金胤重)
저서『퇴성헌유고』

[상세내용]

정희보(鄭熙普)
1683년(숙종 9)∼1763년(영조 3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중욱(仲旭), 호는 퇴성헌(退省軒).

부친은 첨지중추부사 정하주(鄭廈柱)이며, 모친은 안동김씨(安東金氏)사헌부감찰 김윤중(金胤重)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백종조(伯從祖)인 정수석(鄭洙碩)에게 수학하였다.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주위로부터 큰 기대를 모았으며, 영의정 이여(李畬)에게 학문이 높다는 칭찬을 받은 일도 있었다.

1715년(숙종 41) 진사시에,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고,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전적으로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으로 옮겼으며, 1727년 평강현령에 나가 3년 동안 치적을 쌓았다.

1729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갔다가 3년상을 마친 뒤 1732년에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이해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었는데, 정부의 구황정책(救荒政策)이 삼남에만 치우치고 강원도경기도 일원에는 아무런 조처가 없음을 지적, 이의 시정을 간하는 상소문을 올려 왕의 비답을 얻었다.

1733년 사간원정언이 되고, 병조정랑을 거쳐 평안도도사로 부임하여 청나라를 내왕하는 사람들에 대한 검색을 맡아보았다.

1734년 사간원사간, 이듬해 사헌부집의, 1739년 시강원보덕 등을 역임하였다.

1741년 다시 사간이 되었는데, 당시 왕실의 외손이었던 원경하(元景夏)와 의견충돌이 생겨 권귀(權貴)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후 여러 한직을 거치다가 1747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다시 원경하의 무고를 받아 사직하였다.

1750년 황주문안사에 임명되고,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병조참지 등을 거쳐 해미현감으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였다.

1755년 의주문안사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원경하 일당의 모함을 받아 삼척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사장(詞章)에 뛰어나 조하망(曺夏望)강박(姜樸) 등과 함께 교우관계를 맺고 문명을 크게 떨쳤다.

저서로는 『퇴성헌유고』 12권이 전한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退省軒遺稿

[집필자]

이민식(李民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