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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洪汝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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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원(百源)
호(號)목재(木齋)
호(號)산택재(山澤齋)
생년1620(광해군 12)
졸년1674(현종 15)
시대조선중기
본관부계(缶溪)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호(洪鎬)
저서『목재집』

[상세내용]

홍여하(洪汝河)
1620년(광해군 12)∼1674년(현종 15).(주1)
생졸년
한국문집총간의 목재집(木齋集) 11권의 홍여하 행장의 "府君以萬曆庚申四月十日丁巳巳時。生于安東府城東里....肅宗卽位...正席怡然而逝。乃十二月十四日也。享年五十五。"를 참고.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주2)
한국문집총간의 목재집(木齋集) 11권의 홍여하 묘갈명에는 "公諱汝河。字應圖。木齋。號也。"로 되어 있고, 같은 책의 홍여하 행장에는 "府君諱汝河。字百源。姓洪氏。義興缶林縣人。"으로 되어 있다. 행장의 내용을 따른다.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대사간 홍호(洪鎬)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 5)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러 효종에게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 다시 나아가 경성판관이 되었으며,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에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유배되고,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는 『주역구결(周易口訣)』『의례고증(儀禮考證)』『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彙纂麗史)』『동사제강(東史提綱)』『해동성원(海東姓苑)』『경서해의(經書解義)』 등이 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김갑주(金甲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07-09-05홍여하 행장을 참고하여 생몰년을 1620년(광해군 12)∼1674년(현종 15)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