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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후(黃胤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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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희적(希迪)
호(號)월저(月渚)
생년1587(선조 20)
졸년1648(인조 26)
시대조선중기
본관황주(黃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황응성(黃應聖)
외조부노유(盧濡)
출신지평양

[상세내용]

황윤후(黃胤後)
1587년(선조 20)∼1648년(인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황주(黃州). 자는 희적(希迪), 호는 월저(月渚). 평양 출신. 부친은 이천부사 황응성(黃應聖)이며, 모친은 증우윤 노유(盧濡)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 1625년(인조 3)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천거되고, 이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8년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황해도사공조정랑호조정랑순천군수 등을 지낸 뒤 세자시강원사헌부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차례 사관(史官)을 겸하기도 하였다.

특히, 세자시강원에 오래 있으면서 세자를 보도(輔導)한 공으로 상을 받기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구성부사로서 부원수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철옹성(鐵甕城)의 방어에 힘썼으며, 난이 끝난 뒤 백성들의 인심 수습에 공이 컸다. 뒤에 의주부윤에 올랐으며, 동부승지의 내명을 받고 죽었다.

장연부사로 있을 때 향시의 고관(考官)이 되어 세족(勢族)을 낙방시킨 일 때문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으며, 특히 구성부사로 있을 때에는 고려 때의 박서(朴犀)에 비유, 칭송되어 쌍비를 세워 그 덕을 기리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최승희(崔承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