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익(鄭弘翼)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D64DC775B1571X0 |
자(字) | 익지(翼之) |
호(號) | 휴헌(休軒) |
호(號) | 휴암(休菴) |
시호(諡號) | 충정(忠貞) |
생년 | 1571(선조 4) |
졸년 | 1626(인조 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동래(東萊)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사신(鄭思愼) |
모 | 순흥안씨(順興安氏) |
외조부 | 안혼(安混) |
저서 | 『휴옹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홍익(鄭弘翼)
1571년(선조 4)∼1626년(인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익지(翼之), 호는 휴옹(休翁)‧휴헌(休軒)‧휴암(休菴).
부친은 시정(寺正) 정사신(鄭思愼)이며, 모친은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사직 안혼(安混)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주서‧예조좌랑‧정언‧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있을 때 그의 종사관이 되어 함경도‧평안도 등을 순찰하였으며, 황해도암행어사를 역임하였다.
1602년 이후 정언‧지평을 지냈는데,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대북파의 영수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이 성혼(成渾)을 탄핵하자 이를 극력 변호, 정인홍을 공격하다가 권신들의 뜻에 거슬려 단천채은관(端川採銀官)으로 좌천되었으며, 이어 어천찰방(魚川察訪)을 지냈다.
1608년 이후 중앙에 돌아와 교리‧성균관사예 등을 지내고, 1612년(광해군 4) 성천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벼슬에서 탈락되어 산반(散班)으로 지내다가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분원승지(分院承旨)가 되었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 극간하다가 진도‧종성‧광양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풀려나와 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귀양살이에서 얻은 병으로 인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종성의 종산서원(鐘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는 『휴옹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부친은 시정(寺正) 정사신(鄭思愼)이며, 모친은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사직 안혼(安混)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주서‧예조좌랑‧정언‧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있을 때 그의 종사관이 되어 함경도‧평안도 등을 순찰하였으며, 황해도암행어사를 역임하였다.
1602년 이후 정언‧지평을 지냈는데,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대북파의 영수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이 성혼(成渾)을 탄핵하자 이를 극력 변호, 정인홍을 공격하다가 권신들의 뜻에 거슬려 단천채은관(端川採銀官)으로 좌천되었으며, 이어 어천찰방(魚川察訪)을 지냈다.
1608년 이후 중앙에 돌아와 교리‧성균관사예 등을 지내고, 1612년(광해군 4) 성천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벼슬에서 탈락되어 산반(散班)으로 지내다가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분원승지(分院承旨)가 되었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 극간하다가 진도‧종성‧광양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풀려나와 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귀양살이에서 얻은 병으로 인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종성의 종산서원(鐘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는 『휴옹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海東名臣錄
國朝人物考
光海君日記
海東名臣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희권(李羲權)
명 : "홍익(弘翼)"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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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