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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건(林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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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극순(克順)
생년1561(명종 16)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평택(平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임기문(林起門)
조부임종(林悰)
증조부임천손(林千孫)

[상세내용]

임건(林健)
1561년(명종 16)∼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극순(克順). 임천손(林千孫)의 증손으로, 조부는 임종(林悰)이고, 부친은 임기문(林起門)이다.

1600년(선조 33)에 성균관 유생의 대표로, 궁중과 연결되어 기세를 부린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으며,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승문원저작으로 재직하였으며, 1611년(광해군 3) 겸춘추(兼春秋)로 경연에 입시하였다.

그 뒤 『선조실록』 편찬 때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으며, 1615년(광해군 7) 지평장령이 되고,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입록되었다. 1617년(광해군 9) 필선이 되고, 그 뒤 집의로 재직중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에 소극적인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을 탄핵하였으며, 이어 인목대비의 폐출 논의 때 폐출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 뒤 겸보덕교리사간응교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언관에 있으면서 폐모를 주장하는 등, 전후 논계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죄로, 남해(南海)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 뒤 인조에 의해 사면이 몇차례 시도되었으나, 언관의 반대로 좌절되다가, 1635년(인조 13)에 양이(量移: 멀리 유배된 자의 죄를 감하여 가까운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일)로 감형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