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몽필(李夢弼)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BABDD544B1507X0
자(字)은경(殷卿)
생년1507(중종 2)
졸년1562(명종 17)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맹원(李孟元)
조부이현동(李賢童)
증조부이상(李常)
외조부윤종손(尹宗孫)

[상세내용]

이몽필(李夢弼)
1507년(중종 2)∼1562년(명종 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은경(殷卿).

종실 백피도정(白陂都正) 이상(李常)의 증손으로, 조부는 옥계도정(玉溪都正) 이현동(李賢童)이고, 부친은 이맹원(李孟元)이다. 모친은 윤종손(尹宗孫)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형조좌랑지평장령헌납교리사간예조참의병조참의병조참지형조참판경주부윤대사간호조참판 등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534년(중종 29) 헌납으로 있으면서, 무과초시(武科初試)에서 강서(講書)할 때, 시관이 빨리 출방(出榜)하고자, 과거보는 사람 중에 점수가 적은 사람에게는 들어와 강서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는데, 과거를 이처럼 거칠게 할 수 없다며, 그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1537년(중종 32)에 장령으로 사헌부의 여러 관원과 더불어 외척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김안로(金安老)를 죄줄 것을 청하였다. 시독관이 되어 당시 첨사(僉使)만호(萬戶) 등이 백성들에게 침탈한 재물을 조정의 김안로에게 뇌물로 바친다 하고 염치를 숭상하는 풍습을 받들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1538년(중종 33)에는 언관으로서 현량과(賢良科)의 복구를 주장하다가 외방으로 좌천되었다.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어 위엄을 부리지 않고 일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며, 백성들의 부세와 요역을 간략히 하여 몇 달 사이에 교화가 널리 베풀어져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1559년(명종 14)에 대사간이 되어 열 조목의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상소했는데, 기강을 세우고 학교를 높이고 하늘의 경계에 조심할 것, 언로를 열 것, 사기 양성, 내시 억제, 상벌을 분명히 할 것, 수령 선택, 어진이를 등용할 것, 염치를 북돋울 것 등이었다. 사람됨이 간소하여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직무를 이행함에 청렴‧근면하여 훌륭하다는 평판과 함께 청백리에 뽑혔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대표명이몽필(李夢弼)
성명이몽필(李夢弼)

성명 : "이몽필(李夢弼)"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