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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림(洪景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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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윤경(潤卿)
생년?(미상)
졸년1545(인종 1)
시대조선전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임(洪任)

[상세내용]

홍경림(洪景霖)
미상∼1545년(인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윤경(潤卿).

부친은 홍임(洪任)이며, 중종반정과 기묘사화 때 반대파를 타도하는데 큰 공을 세운 홍경주(洪景霔)의 동생이다.

1510년(중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512년 사간이 되고, 다음해 다시 대사간에 올랐다. 빠른 승진에 대하여 사헌부를 비롯한 언론기관에서 반대의 논의도 있었지만, 중종반정 때 형과 같이 세운 공적이 고려되었음인지 무사히 승진되었다.

1513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왕에게 인군이 갖추어야 할 인재등용에 관한 명민한 판단력과 식견, 그리고 합리적인 민치(民治)의 필요성에 대하여 간언을 올렸다.

1517년 승지로 발탁되어 왕의 측근에서 일하다가, 1520년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지방행정을 주도하였다.

그뒤 1523년 호조참판에 발탁되었는데, 같은해 평안도 지방에 유행병이 만연하여 1,800여명의 사망자가 생기자 인구가 조밀한 하삼도(下三道)의 주민들을 뽑아 그곳으로 옮기도록 주장하는 한편, 함경도의 수해대책으로는 정부의 곡식을 즉각 방출하여 실농(失農)을 막자고 강조하였다.

이듬해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525년 낙안광양 등의 고을에 환곡이 부족하자 돌산에 있는 국둔전(國屯田) 산출의 곡식을 보내주자고 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이듬해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1527년 경기도에 흉년이 들자 경창(京倉)의 곡식을 풀어 기민을 구제하자고 왕에게 요청하였다. 같은해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1년 뒤인 1528년 귀국하여 바로 공조참판이 되었다.

다음해 고양에 있는 이생지지(泥生之地)를 절수(折受), 경작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왕은 분명하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파직까지 시킨다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듣지 않았다.

1540년 공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듬해 산림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선 지방에 있는 금산(禁山)에서 많은 벌목을 감행한 홍장수(洪長壽) 등을 처벌하도록 하는 한편, 그 나무는 선공감(繕工監)에 귀속시키자고 하였다. 늦게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정국공신으로서 익원군(益原君)에 봉하여졌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김호종(金昊鍾)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