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林整)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84C815FFFFB1356X0 |
자(字) | 운봉(雲峰) |
호(號) | 보덕(輔德) |
시호(諡號) | 공혜(恭惠) |
생년 | 1356(공민왕 5) |
졸년 | 1413(태종 13)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평택(平澤)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임태순(林台順) |
[관련정보]
[상세내용]
임정(林整)
1356년(공민왕 5)∼1413년(태종 13).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운봉(雲峰), 호는 보덕(輔德). 임태순(林台順)의 아들이다.
향리로 입신하였고, 녹사‧도염서영(都染署令)‧낭장‧도관좌랑(都官佐郞)을 거쳐 1385년(우왕 11)에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그뒤 판도정랑‧이조정랑‧의주목사를 거쳐 1393년(태조 2)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경상도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 등 외직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 총제(摠制)로서 충청‧경상‧전라도의 조운체찰사(漕運體察使)가 되어 콩과 쌀을 전후 10만2000여석을 운송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말 한필을 하사받았다. 같은해 경상‧전라‧충청도체찰사 겸 수군도절제사 조운염철사(漕運鹽鐵使)가 되어 3도의 주민을 동원하여 조선(漕船)을 건조하였는데, 경상도에서 111척, 전라도에서 80척, 충청도에서 60척을 각각 만들었다.
1403년 동북면도순문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고, 이듬해 중군도총제로 명나라에 가서 백성을 본국에 환속시켜준 데 대하여 사례를 하였다.
1407년 형조판서를 거쳐 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영흥부윤이 되었다가, 1410년 다시 형조판서가 되어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다녀왔다.
이듬해 서북면순문사가 되었으나 평양부에서 종기가 나 4일 만에 죽었다. 사람됨이 근실하고 중후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치적이 뛰어나 백성들이 기꺼이 복종하였다는 사관의 평을 받았다. 성종조에 청백리에 뽑혔으며, 1482년(성종 13)에 사패(賜牌)로 산 40리를 받았다. 시호는 공혜(恭惠)이다.
향리로 입신하였고, 녹사‧도염서영(都染署令)‧낭장‧도관좌랑(都官佐郞)을 거쳐 1385년(우왕 11)에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그뒤 판도정랑‧이조정랑‧의주목사를 거쳐 1393년(태조 2)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경상도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 등 외직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 총제(摠制)로서 충청‧경상‧전라도의 조운체찰사(漕運體察使)가 되어 콩과 쌀을 전후 10만2000여석을 운송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말 한필을 하사받았다. 같은해 경상‧전라‧충청도체찰사 겸 수군도절제사 조운염철사(漕運鹽鐵使)가 되어 3도의 주민을 동원하여 조선(漕船)을 건조하였는데, 경상도에서 111척, 전라도에서 80척, 충청도에서 60척을 각각 만들었다.
1403년 동북면도순문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고, 이듬해 중군도총제로 명나라에 가서 백성을 본국에 환속시켜준 데 대하여 사례를 하였다.
1407년 형조판서를 거쳐 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영흥부윤이 되었다가, 1410년 다시 형조판서가 되어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다녀왔다.
이듬해 서북면순문사가 되었으나 평양부에서 종기가 나 4일 만에 죽었다. 사람됨이 근실하고 중후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치적이 뛰어나 백성들이 기꺼이 복종하였다는 사관의 평을 받았다. 성종조에 청백리에 뽑혔으며, 1482년(성종 13)에 사패(賜牌)로 산 40리를 받았다. 시호는 공혜(恭惠)이다.
[참고문헌]
定宗實錄
太宗實錄
恭惠公歷仕錄
平澤林氏大同譜
朝鮮王朝軍船硏究(金在瑾, 一潮閣, 1977)
太宗實錄
恭惠公歷仕錄
平澤林氏大同譜
朝鮮王朝軍船硏究(金在瑾, 一潮閣, 1977)
[집필자]
이재철(李在喆)
성명 : "임정(林整)"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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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