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룡(李鎭龍)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9C4B8E1U9999X0 |
이명(異名) | 이석대(李錫大)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항일기 |
활동분야 | 호국 > 의병 |
처 | 우씨(禹氏) |
출신지 | 황해도 평산 |
공훈 | 건국훈장 국민장 |
[상세내용]
이진룡(李鎭龍)
생졸년 미상. 한말의 의병‧독립운동가. 일명 석대(錫大). 황해도 평산 출신.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박정빈(朴正彬)‧조맹선(趙孟善)‧신준빈(申俊彬)‧신정희(申貞熙)‧한정만(韓貞萬) 등과 함께 애국청년들을 규합, 평산에서 거의하여 박기섭(朴箕燮)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선봉장이 되었다. 의진의 선두에 서서 5개 부대의 병사를 지휘하여 평산, 경의선 계정(鷄井), 예성강 연안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말에는 하상태(河相泰)‧한정만과 함께 강화도에서 온 지홍기의진(池洪基義陣)과 연합하여 황해도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때 적병이 뒤를 추격하므로 가족을 서울로 보내어 이정규(李正奎)에게 맡겼다.
1909년 5월 연기우(延基羽)‧김수민(金秀敏)‧하상태‧한정만‧이인순(李仁淳)‧정용대(鄭用大)와 더불어 동으로 철원‧평강에서, 서로는 평산‧배천 등 3도를 내왕하면서 활동하였다. 적의 필사적 소탕중에도 군자금을 모금하여 전투에 사용할 각종 무기를 매입, 병력을 증강하였다.
1910년에는 경의선의 계정과 잠성(岑城)사이의 철로를 파괴하고, 평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이 전투에서 10명의 부하가 붙잡혔다.
그뒤 개성‧해주‧서흥(瑞興) 등지에서 500명의 부하를 3개 부대로 나누어 보병 7중대 및 기병과 접전하였는데, 부장은 김정안(金貞安)‧최순거(崔順巨)‧한정만이었고, 이때 100여명의 부하가 붙잡혔다.
1911년에는 황해도 해주‧평산‧곡산 일대에서 5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적보병 제3여단장 나카무라(中村)소장이 지휘하는 보병 16중대와 기병 2중대 및 헌병과 접전하여 250명의 부하가 잡히고 말았다.
그뒤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1911년 10월 지휘권을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조맹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이르러 조맹선‧이종협(李鍾協) 등과 재기를 꾀하여 활동하다가 뒤에 박장호(朴長浩)‧윤세복(尹世復)‧조맹선‧홍범도(洪範圖) 등과 같이 장백(長白)‧무송현(撫松縣) 등지에 근거를 두고 포수단을 조직,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만주 각지에 산재한 한국이주민들을 규합, 항일사상을 고취하여 국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동시에 애국청년소집과 군자금모금운동에 주력하였다.
1916년 가을에 조맹선‧황봉운(黃鳳雲)‧황봉신(黃鳳信)‧김원섭(金元燮)‧김일(金鎰)‧김효선(金孝善)‧한치현(韓致賢) 등 7명과 함께 군자금조달을 목적으로 평안북도 운산금광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9월 9일 이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압록강을 건너 영변군 팔원면 용성동의 밀림 가운데 잠복, 평양으로부터 운산‧북진(北鎭)으로 들어오는 송금마차를 기다렸다. 이들은 마차를 기습공격하였으나, 현금마차가 아니어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추격하는 일본군의 눈을 피하여 전원 무사히 만주기지로 귀대하였다.
1918년 1월 조맹선‧황봉신‧차도선(車道善) 등과 함께 충의사(忠義社)라는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고자 만주로 망명해오는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며 계몽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만주에 분산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를 규합하여 국내침공을 감행하기 위한 대규모적인 기구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계획이 무르익어갈 때 일본의 주구 임곡(林谷)의 밀고로 관전현(寬甸縣)에서 잡혀 여순(旅順)으로 압송되어가던 도중에 황봉운‧황봉신 형제가 탈환하려다가 같이 잡혔다. 이들은 평양지방법원에서 함께 사형언도를 받고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우씨(禹氏)도 따라서 순절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박정빈(朴正彬)‧조맹선(趙孟善)‧신준빈(申俊彬)‧신정희(申貞熙)‧한정만(韓貞萬) 등과 함께 애국청년들을 규합, 평산에서 거의하여 박기섭(朴箕燮)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선봉장이 되었다. 의진의 선두에 서서 5개 부대의 병사를 지휘하여 평산, 경의선 계정(鷄井), 예성강 연안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말에는 하상태(河相泰)‧한정만과 함께 강화도에서 온 지홍기의진(池洪基義陣)과 연합하여 황해도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때 적병이 뒤를 추격하므로 가족을 서울로 보내어 이정규(李正奎)에게 맡겼다.
1909년 5월 연기우(延基羽)‧김수민(金秀敏)‧하상태‧한정만‧이인순(李仁淳)‧정용대(鄭用大)와 더불어 동으로 철원‧평강에서, 서로는 평산‧배천 등 3도를 내왕하면서 활동하였다. 적의 필사적 소탕중에도 군자금을 모금하여 전투에 사용할 각종 무기를 매입, 병력을 증강하였다.
1910년에는 경의선의 계정과 잠성(岑城)사이의 철로를 파괴하고, 평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이 전투에서 10명의 부하가 붙잡혔다.
그뒤 개성‧해주‧서흥(瑞興) 등지에서 500명의 부하를 3개 부대로 나누어 보병 7중대 및 기병과 접전하였는데, 부장은 김정안(金貞安)‧최순거(崔順巨)‧한정만이었고, 이때 100여명의 부하가 붙잡혔다.
1911년에는 황해도 해주‧평산‧곡산 일대에서 5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적보병 제3여단장 나카무라(中村)소장이 지휘하는 보병 16중대와 기병 2중대 및 헌병과 접전하여 250명의 부하가 잡히고 말았다.
그뒤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1911년 10월 지휘권을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조맹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이르러 조맹선‧이종협(李鍾協) 등과 재기를 꾀하여 활동하다가 뒤에 박장호(朴長浩)‧윤세복(尹世復)‧조맹선‧홍범도(洪範圖) 등과 같이 장백(長白)‧무송현(撫松縣) 등지에 근거를 두고 포수단을 조직,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만주 각지에 산재한 한국이주민들을 규합, 항일사상을 고취하여 국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동시에 애국청년소집과 군자금모금운동에 주력하였다.
1916년 가을에 조맹선‧황봉운(黃鳳雲)‧황봉신(黃鳳信)‧김원섭(金元燮)‧김일(金鎰)‧김효선(金孝善)‧한치현(韓致賢) 등 7명과 함께 군자금조달을 목적으로 평안북도 운산금광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9월 9일 이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압록강을 건너 영변군 팔원면 용성동의 밀림 가운데 잠복, 평양으로부터 운산‧북진(北鎭)으로 들어오는 송금마차를 기다렸다. 이들은 마차를 기습공격하였으나, 현금마차가 아니어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추격하는 일본군의 눈을 피하여 전원 무사히 만주기지로 귀대하였다.
1918년 1월 조맹선‧황봉신‧차도선(車道善) 등과 함께 충의사(忠義社)라는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고자 만주로 망명해오는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며 계몽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만주에 분산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를 규합하여 국내침공을 감행하기 위한 대규모적인 기구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계획이 무르익어갈 때 일본의 주구 임곡(林谷)의 밀고로 관전현(寬甸縣)에서 잡혀 여순(旅順)으로 압송되어가던 도중에 황봉운‧황봉신 형제가 탈환하려다가 같이 잡혔다. 이들은 평양지방법원에서 함께 사형언도를 받고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우씨(禹氏)도 따라서 순절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梅泉野錄
朝鮮獨立運動 Ⅰ(金正明編, 原書房, 1967)
독립운동사 1‧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3)
독립운동사자료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朝鮮獨立運動 Ⅰ(金正明編, 原書房, 1967)
독립운동사 1‧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3)
독립운동사자료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집필자]
박성수(朴成壽)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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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