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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金秀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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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수민(金守民)
생년?(미상)
졸년1908(융희 2)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의병
출신지경기도 장단
공훈건국훈장국민장

[상세내용]

김수민(金秀敏)
미상∼1908년. 한말의 의병장. 일명 김수민(金守民). 경기도 장단 출신. 농민으로 일찍이 동학운동 때 농민군에 가담하여 동학당으로 지목을 받아왔다.

1907년에 고종의 퇴위,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8월에 고향인 장단군 북면 솔랑리에서 의병모집에 착수하였다.

병력이 300명에 이르자 개성군 대흥산 창고에 보관중이던 정부소유의 대포 39문과 소포 150문을 탈취하여 무장하고, 13도총도독이 되어 의병 2천명을 거느리고 장단군 덕음동에 웅거하였다.

그는 이곳에 군량을 저축하고 보부상들을 모집하여 원근의 적정을 밀탐하도록 포열하였으며, 의병들의 복장은 송백(松柏)의 위장색으로 염색하여 착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용으로 충당되는 양곡과 의복은 부호들로부터 징발하여 농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엄금하였다. 용감하고 화약과 탄환을 스스로 제작하여 사용하였으므로 의병장 중에서도 유명하다.

또한, 전술에도 능하여 의병부대가 이합집산을 교묘히 하여 각지에 출몰하면서 기습공격으로 적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908년에는 허위(許蔿)이은찬(李殷瓚) 등의 임진강 의병연합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의병부대를 20명에서 30명 정도의 병력으로 유격대를 편성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는데, 4월 16일에는 구화장(九化場) 일본헌병분견대를 기습공격하여 병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이 병기와 탄약으로 무장을 재정비한 뒤 장단풍덕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맹위를 떨치다가 점차 남하하여 10월 상순에는 강화도를 기습공격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군이 용산에서 급파된 증원군과 합세하여 공격해왔는데, 이때 정족산(鼎足山) 전등사(傳燈寺)에 웅거하고 있던 약 100명의 의병이 접근해오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타격을 입힌 뒤 강화부로 격퇴시켰다.

그러자 일본군이 다시 용산개성해주연안 등지에 증원군을 청하여, 11월 26일부터 대대적인 의병소탕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의병부대의 유격대원이 강화부 남쪽의 정두동(亭頭洞)산문동(山門洞) 등지에서 그들을 공격하여 타격을 입힌 뒤 의병부대는 배를 타고 황해도와 주변도서로 이동하고 말았다.

강화도기습작전을 끝낸 뒤 보다 적극적인 항일전을 기도할 목적으로 서울에 잠입하여 인력거꾼 노릇을 하며 적정을 탐지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獨立運動之血史(朴殷植)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義兵傳(尹炳奭, 韓國近代史料論, 一潮閣, 1979)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집필자]

박광성(朴廣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