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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鄭華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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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정현섭(鄭賢燮)
자(字)윤옥(允玉)
호(號)화암(華巖)
생년1896(건양 1)
졸년1981
시대항일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전라북도 김제
저서『나의 회고록』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정화암(鄭華巖)
1896년∼1981년. 독립운동가. 자는 윤옥(允玉), 호는 화암(華巖). 본명은 정현섭(鄭賢燮). 본관은 동래(東萊)(주1)
본관
東萊鄭氏族譜를 참고하여 본관을 동래(東萊)로 추가함.
. 전라북도 김제 출신.

조부는 정철연(鄭轍淵)이고, 부친은 정환전(鄭桓全)이다. 외조부는 진주강씨(晉州姜氏) 강흔계(姜昕季)이고, 처부는 김제조씨(金堤趙氏) 조응식(趙膺植)수원백씨(水原白氏) 백원보(白元普)이다(주2)
가족
東萊鄭氏族譜를 참고하여 부, 조부, 외조부, 처부를 추가함.
.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극동을 시찰하는 미국의원단의 한반도 방문 때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건의하려다 일본경찰에 쫓기게 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여 조국광복운동은 혁명적 무력투쟁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협의한 뒤 중국국민혁명의 원로 리스쳉(李石曾)우중후이(吳鍾暉) 등과 제휴, 동방자유혁명자연맹(東方自由革命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30년 4월 20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여 직접적인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재중국무정부주의자 유기석(柳基石)을 만나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함께 활동하던 중, 1931년 1월 원심창(元心昌)상해에 오게 됨을 계기로 조직을 강화하고 상해일대에서 친일배 및 전향자 등을 색출, 사살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독립운동에 일대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3년 3월 이강훈(李康勳)원심창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과 규합,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였다.

1933년 3월 중순 일본 주중(駐中)상해공사 아리요시(有吉明)중국 유력자를 육삼정(六三亭)에 초청하여 연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밀정의 보고로 거사 직전에 잡혔다.

1936년 국내 호서은행(湖西銀行)에서 탈취하여 온 5만7000원을 기금으로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별동대 맹혈단(猛血團)을 편성하는 한편, 중국 항일운동세력과 연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中韓靑年聯合會)를 조직하였으며,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였다.

1940년부터 푸젠성(福建省)내에서 이강(李剛)과 함께 광복 때까지 광복군 활동의 현지 책임자를 지냈다.

특히, 이때 일본군의 수송로에 잠복하였다가 이를 폭파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한편으로는 생포된 연합군의 포로를 구출하는 공작에도 공헌하였다.

또한, 일본군내의 한국인 학도병 탈출공작도 아울러 전개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4‧19의거 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나의 회고록』이 있다.

198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獨立運動史(愛國同志援護會, 1956)
朝鮮獨立運動 Ⅱ(金正明編, 原書房, 1967)
韓國獨立運動史 4(國史編纂委員會, 1968)
독립운동사 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독립운동사자료집 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鄭華巖, 자유문고, 1982)
獨立有功者功勳錄 5(國家報勳處, 1988)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臨政과 李東寧硏究(李炫熙, 一潮閣, 1989)
韓民族光復鬪爭史(李炫熙, 正音文化社, 1989)
光復鬪爭의 선구자(李炫熙, 東方圖書, 1990)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