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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식(金明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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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91(고종 28)
졸년1924
시대항일기
본관김해(金海)
활동분야사회 > 민족운동가
출신지제주

[상세내용]

김명식(金明植)
1891년(고종 28)∼1924년. 민족운동가‧언론인. 본관은 김해(金海). 제주 출신.

향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고학을 하면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과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당시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간사부장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1919년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창간에 참가하여 논설위원을 역임하다가 1922년 2월에 그만두었다.

1922년 1월에는 박희도(朴熙道)에게 출판사의 설립을 권유하여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립하게 하고, 사장 박희도, 전무이사 이병조(李秉祚)와 더불어 이사 겸 주필에 취임하여, 월간지 『신생활』을 발행하였다.

또한, 신일용(辛日鎔)유진희(兪鎭熙) 등을 추천하여 기자로 입사하게 했다.

같은해 11월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는 글을 써서 『신생활』에 게재하였다는 혐의로, 사장 박희도, 기자 신일용유진희와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소환되어 취조를 받다가 12월 12일 기소되어 이듬해 1월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미리 예정된 재판을 받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항소를 포기하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신병으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풀려났다.

이 신생활사재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재판이라 하여 당시 장안이 떠들썩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법조계‧언론계 인사들이 이 사건을 언론탄압의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피고인들에 대한 선처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던 1920년 6월 28일에는 경향 각지에서 조직되고 있던 청년회의 연합통일체를 조직하기 위해, 장덕수(張德秀)오상근(吳祥根)장도빈(張道斌)박일병(朴一秉)안확(安廓) 등 50여 명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를 발족시켰으며, 이어 12월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전국 각지의 116개 청년단체의 대표자 124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고, 지방부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1월에는 장덕수오상근 등과 함께 전국 청년단체의 통일을 목적으로 조직된 연합회의 중앙지도단체로서 서울청년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노동운동에도 참여하여, 1921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 제3회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東亞日報
韓國新聞史(崔埈, 一潮閣, 1960)
東亞日報社史 1(東亞日報社, 1975)
독립운동사 3‧9‧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1977‧1978)
독립운동사자료집 12‧13‧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1978)

[이미지]

[집필자]

김호일(金鎬逸)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09-11-26제주도 조천리 김해김씨 문중 출신임을 고려하여 본관을 미상에서 김해로 함. [진보평론] 제 2호에 실린 박종린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의 글에 따르면, 그의 조부 김응전은 해미군수를, 종조부 김응빈은 제주판관을, 부친 김문주는 정의군수를 지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