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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개(張判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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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장판개(張判介)
호(號)학순(鶴舜)
생년1885(고종 22)
졸년1937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음악 > 명창
출생지전라북도 순창

[상세내용]

장판개(張判盖)
1885년(고종 22)∼1937년. 조선 고종 때부터 일제 초기까지 활약한 판소리 명창 중의 한 사람. 이명은 장판개(張判介). 호는 학순(鶴舜). 전라남도 곡성(주1)
거주지
곡성군 겸면사무소 제적등본을 참고하여 출신지를 전라북도 순창에서 전라남도 곡성으로 수정함.
출생.

조부는 장주한이며, 부친은 장석중(張石中)이다. 모친은 이금화(李金華)로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김옥란(金玉蘭)으로 4남을 두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풍류나 판소리에 능하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천성적으로 재질이 있고 목소리가 좋아서 집안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젊어서는 아버지에게 거문고‧피리와 같은 악기를 배우고 줄타기도 공부하였으나 판소리에 뜻을 두어 김채만(金采萬)의 고수(鼓手)로 들어가 판소리를 배웠으며 다시 송만갑(宋萬甲)의 고수로 들어가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다.

판소리의 기예가 뛰어나 송만갑의 제자 중에 첫손에 꼽히는 명창이 되었다.

21세 때 서울에 올라와 원각사(圓覺社)무대에 출연하였고, 원각사 폐사 이후에는 1908년 협률사(協律社)에 참여하여 지방순회를 하였다. 송만갑 협률사는 1910년 8월 충무시 통영에서 공연을 하던 중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그날로 해산됐다.

한편, 1904년 7월 어전에서도 소리를 하여 고종으로부터 참봉(參奉) 교지를 받았다 한다.

서울에서 장안사와 연흥사 창극 공연에 참여했으며, 창극 「춘향전」에서 이도령을 맡아 춘향역의 배설향(裵雪香)과 열연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1909년 기생조합을 조직하게 해 양성화하고 1918년 권번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판소리도 권번중심으로 바뀌게 되어 판소리가 신극 등에 밀려 쇠퇴하자 명창들은 지방활동에 들어갔다. 1918년 송만갑 협률사 지방 순회 공연을 하였으며, 1920년 배설향과 함께 전주 권번 소리선생으로 가게 되었다.

판소리 다섯마당을 모두 잘 하였으나, 특히 「적벽가(赤壁歌)」를 잘 하였고, 그 중 ‘장판교(長板橋) 싸움’의 대목은 일품이었다.

모친 이금화가 1922년 곡성군 겸면 현정리에서 사망하였고, 1922년 집안이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 227번지로 이사하게 되었다. 1924년 부인 김옥란이 금과면 내동리 일대 10여개 마을 당골판을 관리했으며, 장판개 선생은 아편으로 몸이 상해 순창 금과면에서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다 1937년 53살을 일기로 소리인생을 마감했다.

5명창 이후 첫손 꼽는 명창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으나 53세로 죽어 그의 뒤를 이은 명창이 많지 않다. 배설향이 그의 수제자로 꼽히고 있다.

1935년 단가 ‘진국명산’과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녹음해 음반으로 남겼다. 이 소리는 젊은 나이에 아편으로 목이 망가진 장판개 명창이 죽음을 앞두고 전력을 다한 소리가 담겨져 있다. 장판개 명창의 동생 장도순(1892~1926)과 장도순의 딸 장월중선(1925~1998,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장월중선의 딸 정순임(무형문화재 제34호)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2007년 문화관광부로부터 ‘판소리명가 1호’로 지정받은 바 있다.

[참고문헌]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한국의 판소리(정병욱, 집문당, 1981)
세습무계의 통혼과 판소리 전승의 상관성, 목포대학교 대학원 정대하 학위논문(2005년), p.27~p.40
곡성군 겸면사무소 제적등본

[집필자]

이보형(李輔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