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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李元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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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이원익(李元翼)
생년1885(고종 22)
졸년1963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평안북도 선천

[상세내용]

이원익(李元益)
1885년(고종 22)∼1963년. 독립운동가‧목사. 일명 원익(元翼). 평안북도 선천 출신.

1919년 평안북도 의주의 고령교회(古寧敎會)목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을 주도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외 1인인 유여대(劉如大)를 비롯한 김병조(金秉祚)김승만(金承萬)장덕로(張德櫓) 등과 시위를 계획하고, 50여개 교회와 각 단체에 통고문을 몰래 전한 뒤 양실학원(養實學院)에서 회의하던 중 3월 1일 서울의 시위소식이 전하여지자 김창수(金昌洙)안석응(安碩鷹)과 함께 선언서를 군청‧도청‧경무국‧헌병대에 전하고 시민에게 나누어주었다.

유여대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2,000여명이 시위를 하자 일본경찰과 격돌하게 되었으며, 이를 피하여 평안북도 구성군으로 가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태천경찰서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4월 김병조장덕로 등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곧이어 제2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평안도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정부내에 설치된 임시사료편찬회(臨時史料編纂會)김병조 등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대표 여운형(呂運亨)파리에 파견될 때, 목사 안승원(安承源) 등과 장로 김시혁(金時赫) 등 11인과 함께 연서(連署)한 ‘한국시정진술서(韓國時情陳述書)’를 국제연맹 장로교만국연합총회 및 미주 각 교회에 보내어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으며, 그밖에도 국민대표회기성위원회(國民代表會期成委員會)집행위원과 임시의정원 외교위원회위원 등을 맡았다.

같은해 대한적십자회에 가입하여 자유대(自由隊)대원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임시정부 서무국장을 지내고 한중국민호조사(韓中國民互助社)에서도 활동하였다.

1921년 조직된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의 서기가 되었으며, 1924년 임시정부 인사국장, 1925년 비준국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 자금조달차 입국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獨立運動史略(金秉祚, 1920)
武裝獨立運動秘史(蔡根植, 大韓民國公報處, 1949)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74)
韓國獨立運動史 2(國史編纂委員會, 1974)
獨立有功者功勳錄 5(國家報勳處, 1988)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局, 1934)

[집필자]

하원호(河元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