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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여대(劉如大)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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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낙포(樂圃)
생년1878(고종 15)
졸년1937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종교 > 기독교인
유택현(劉澤賢)
출신지평안북도 의주
저서『면무식(免無識)』
저서『위인기담(偉人奇談)』
저서『강도예전(講道例傳)』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상세내용]

유여대(劉如大)
1878년(고종 15)∼1937년. 목사.

3‧1운동 33인의 한 사람. 호는 낙포(樂圃). 평안북도 의주 출신. 유택현(劉澤賢)의 아들이다.

23세 때에 의주에서 양실학교(養實學校)를 설립하였다.

27세 때에 의주서교회당에서 미국 선교사 위대모(魏大模, Whittemore, N. C.)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으며, 그뒤 전도사가 되어 송장면교회‧수진면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사업을 하다가 1909년에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목사가 되어 의주동교회에 시무하면서 야학을 개설, 문맹퇴치‧민중계몽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때, 선천의 양전백(梁甸伯)목사 집에서 이승훈(李昇薰)이명룡(李明龍)김병조(金秉祚) 등과 독립만세운동에 민족대표로 서명하는 한편, 의주에서의 만세운동을 따로 계획하였다.

의주로 돌아와 정명채(鄭命采)김두칠(金斗七)도형균(都衡均)안석응(安碩應)강용상(康龍祥)허상련(許尙璉) 등 20여명의 협조를 얻어 만세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수립하고, 당일에는 자신이 이끄는 기독교 신자들과 양실학교 생도 200여명 및 그 부형 등 700∼800여명을 모아 찬미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며 독립선언서를 배포,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헌병에게 붙잡혀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의주동교회에 시무하면서 3‧1운동으로 폐교되었던 양실학교를 재건하여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1931년 의주동교회를 사임하고 백마교회로 옮겨 시무하였다.

그뒤 신병으로 백마교회를 사임하고 민족계몽을 위하여 병상에서 『면무식(免無識)』『위인기담(偉人奇談)』『강도예전(講道例傳)』 등의 저서를 간행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三‧一運動秘史(李炳憲, 時事時報社, 1959)
韓國獨立運動史 2‧3(國史編纂委員會, 1966‧1967)

[집필자]

이만렬(李萬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