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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한주(林翰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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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임면주(林冕周)
호(號)성헌(性軒)
생년1871(고종 8)
졸년1954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의병
임노직(林魯直)
출신지충청남도 청양
공훈건국포장

[상세내용]

임한주(林翰周)
1871년(고종 8)∼1954년. 한말의 의병. 일명 면주(冕周). 호는 성헌(性軒). 충청남도 청양 출신. 임노직(林魯直)의 아들이며, 승주(承周)의 아우이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발발하자 홍주를 중심으로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안창식(安昌植)안병찬(安炳瓚)부자 및 이근주(李根周) 등과 함께 거의할 것을 모의하였다.

1896년 1월 13일부터 15일 사이에 이세영(李世永)이봉학(李鳳學) 등이 홍주성에 입성하였고, 이승우(李勝宇)가 자진하여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 되었으며, 17일에는 김복한을 주장으로 한 홍주의진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소모활동차 떠난 사이에 이승우가 성중에 남아 있던 김복한이설 등 의병관계 인사들을 체포하여 제1차홍주의거는 무산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차의병운동에 참여하였던 홍주의진이 재조직되어 민종식(閔宗植)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홍주성을 점령하였으나 왜군의 반격을 받아 패하였다. 그는 당시 군사록(軍史錄)을 작성하고 뒤에 ‘홍양기사(洪陽記事)’를 엮어내었다.

1919년 3월에 영남유림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도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여 그해 5월에 잡혀 7월에 징역 6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忠南靑陽警察署事實照會書
독립운동사 1‧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6)
독립운동사자료집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집필자]

박성수(朴成壽)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