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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金福漢)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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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오(元五)
호(號)지산(志山)
생년1860(철종 11)
졸년1924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봉진(金鳳鎭)
출신지공주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김복한(金福漢)
1860년(철종 11)∼1924년. 조선말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원오(元五), 호는 지산(志山).

부친은 김봉진(金鳳鎭)이다. 공주 출신.

189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로, 이듬해에는 사서(司書)에 제수되었으며, 성균관대사성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894년 승정원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6월에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자정(自靖)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듬해 8월에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이설(李偰)안병찬(安炳瓚) 등과 같이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를 권유하여 항일의병을 일으켰으나, 이승우가 일제와 내통함으로써 일본군에게 잡혀 투옥되었다.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어 성균관장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상소하여 왜적과 역적들을 토벌하지 못하였다 하여 사퇴하고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설과 함께 이지용(李址鎔)박제순(朴齊純)이완용(李完用) 등 5적의 참수를 간청하는 소를 올리다가 투옥되었다.

1906년에 민종식(閔宗植)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07년에도 의병은닉과 민심선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공주로 압송되는 도중에 일본순검에게 무수히 구타당하고 어렵게 목숨을 건졌으나, 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평생 동안 식사와 용변을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하게 되었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병탄된 뒤로는 일제의 심한 감시 속에 두문불출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문인 박경호(朴敬鎬)를 상경시켜 유림대표들과 협의하게 하였고, 영남의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호서의 유림을 대표하여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발송하였다. 뒤에 발각되어 모두 일본경찰에 붙잡혔는데, 옥중에서 중병으로 9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1년부터는 인지사(仁智社)를 세워 후진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痛史
洪陽紀事
志山金福漢先生年譜(1952)
志山金福漢先生略史
3‧1運動과 儒敎界(許善道, 3‧1運動50周年記念論文集, 東亞日報社, 1969)

[집필자]

조항래(趙恒來)

성명 : "김복한(金福漢)"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春坊先生案 司書 金福漢 元五 庚申 安東人 癸巳九月十八日政 除拜
龍城誌n1-7책題遜寓八景詩帖後大司成金福漢 右遜窩八景詩完山李公陽運所作也公以醇德 懿行聞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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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末忠義錄n1-2책召集民衆安炳瓚初以等訴頭強請防報斷髮事 於京司終與金福漢等相應同爲設謀李偰思報國讐討賊 慮言事疏之不得入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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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末忠義錄n1-2책供 辭洪州府前後報告書相證明白以此 照律 ○特旨曰金福漢李偰洪楗宋秉稷李相麟安炳瓚等不能 度時量力妄起民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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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