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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항식(安恒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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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60(철종 11)
졸년1922
시대조선후기
본관순흥(順興)
활동분야호국 > 의병
출신지충청남도 청양
공훈건국포장
공훈건애국장

[상세내용]

안항식(安恒植)
1860년(철종 11)∼1922년. 한말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충청남도 청양 출신.

향리에서 도학을 강구하고 후진교육에 전념하던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듬해 음력 4월 중순 정산(定山: 지금의 청양)에서 은거하던 전참판 민종식(閔宗植)홍산(鴻山)의 지치(支峙)에서 의거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4월말 홍주성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보균(申輔均)신현두(申鉉斗)이칙(李侙) 등과 홍주의진에 합류하여 참모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총순과 순사 등 3명과 왜병 30여명을 생포,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뒤 홍주성으로부터 패주한 관군과 일본군이 홍주성을 재탈환하고자 대공세를 감행하자 수일간의 공방전을 전개하며 성을 사수하였으나, 윤4월 9일 새벽전투에서 패전하여 동지 80여명과 함께 적의 포로가 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던 중 적이 제공하는 식사를 거절하는 등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해 7월 윤석봉(尹錫鳳) 등 70여명이 석방되고, 남규진(南奎振)유준근(柳濬根)이식신현두이상구(李相龜)문석환(文奭煥)신보균최상집(崔相集)과 함께 유죄선고를 받고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얼마 뒤 태인에서 의거한 최익현(崔益鉉)이 이곳으로 유배되어오자 시와 학문을 논하였으며, 동지와 함께 최익현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국권상실 후 풀려나 향리에서 주경야독하며 지냈다.

1977년 건국포장이, 1990년 건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2‧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1)

[집필자]

박성수(朴成壽)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12-29독립운동사자료집 2‧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1)을 참고하여 본관을 순흥(順興)으로 추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