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신보균(申輔均)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2E0BCF4ADE0B1862X0
호(號)미호(眉湖)
생년1862(철종 13)
졸년1912
시대조선후기
본관평산(平山)
활동분야호국 > 의병
출신지충청남도 홍주(洪州: 지금의 洪城)
공훈건국포장

[상세내용]

신보균(申輔均)
1862년(철종 13)∼1912년. 한말의 의병.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미호(眉湖). 충청남도 홍주(洪州: 지금의 洪城) 출신.

1906년 음력 4월 18일 전참판 민종식(閔宗植)을 대장으로 하는 의병이 충청도 홍산에서 창의하여 서천(舒川)남포(藍浦) 등지를 경유하면서 병력을 보강하였다.

4월 26일 홍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홍주성을 점령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홍주성을 장악한 의병진은 진용을 정비하였는데 그는 유병소서기(儒兵所書記)에 임명되었다.

윤4월 9일 의병진에 대한 일본군의 대공세로 성은 마침내 함락되어 100여명이 순국하고 그를 비롯한 80여 의병이 서울의 일본군사령부에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6월 상순에 70여명은 석방되었으나 그는 이식(李栻)남규진(南奎振)유준근(柳濬根) 등과 함께 9인(洪州九義士)이 대마도감금으로 결정되었다.

6월 19일 대마도에 도착한 이들은 이즈하라(嚴原)경비대에서 억류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7월 9일에는 최익현(崔益鉉)임병찬(林炳瓚)대마도로 유배되어 왔다.

11월 17일 최익현이 유배지에서 순절하자 의사들 모두가 흰 두건을 쓰고 장례집사가 되어 전제(奠祭)를 지냈다. 신보균대마도의 억류생활에도 우국충절에 관한 절구시를 많이 남겼다.

또한, 적의 감언이설이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4년 만에 감금에서 방면되었다.

198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梅泉野錄
韓國獨立運動史 1(國史編纂委員會, 1965)
洪陽史(洪陽史出版委員會, 1969)
독립운동사자료집 2‧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1)
獨立有功者功勳錄 1(國家報勳處, 1986)

[집필자]

신지현(申芝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