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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영(金澤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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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우림(于霖)
호(號)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생년1850(철종 1)
졸년1927
시대조선후기
본관화개(花開)
활동분야학자 > 유생
김익복(金益福)
외조부윤희락(尹禧樂)
출생지개성
저서『한국소사(韓國小史)』
저서『한사경(韓史綮)』
저서『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저서『창강고(滄江稿)』
저서『소호당집(韶濩堂集)』

[상세내용]

김택영(金澤榮)
1850년(철종 1)∼1927년.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개성 출생.

개성부(開城府) 분감역(分監役) 김익복(金益福)의 둘째아들이며, 모친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희락(尹禧樂)의 딸이다.

소년시절부터 고문과 한시를 공부해서 17세에는 성균초시(成均初試)에 합격했다.

20대 전후에 이건창(李建昌)과 교유를 가지면서 문명을 얻기 시작했다.

34세인 1883년 김윤식(金允植)의 추천으로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 장첸(張騫)과 알게 되었으며 장첸은 그의 시문을 격찬했다.

1891년(고종 28)에 42세로 진사가 되고, 1894년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 중추원서기관(中樞院書記官)을 지내고 이듬해 낙향했다.

1903년 다시 홍문관 찬집소(纂集所)에 보직되어 문헌비고 속찬위원(續撰委員)으로 있으면서 통정대부에 오르고, 1905년 학부 편집위원이 되었으나, 이해 겨울에 사직했다.

을사조약으로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1908년 중국으로 망명, 양쯔강(揚子江)하류 난퉁(南通)에서 장첸의 협조로 출판소의 일을 보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창작활동과 병행해서 한문학에 대한 정리‧평가와 역사 서술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이승만(李承晩) 등과 관계가 있어 중화민국정부에 우리나라 독립 지원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쓴 일이 있고, 중국의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장핑린(章炳麟)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한문학사의 종막을 장식하는 대가로서 시에서의 황현(黃玹)과 문(文)에서의 이건창과 병칭된다. 그는 고문가(古文家)로서 문장일도(文章一道)를 주장하였으며, 우리나라 고문의 전통과 맥락을 독자적으로 체계화시켰는데, 이른바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화려하여 신운(神韻)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중국 망명 이후에는 주로 우국적인 시작품을 많이 썼다.

특히, 망국의 한을 작품 속에 담아 내어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오호부(嗚呼賦)」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의 역사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문은 명나라귀유광(歸有光)박지원(朴趾源)의 문장을 좋아하여 웅혼한 기상이 있다.

저서로는 『한국소사(韓國小史)』『한사경(韓史綮)』『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등이 있고 시문집으로 『창강고(滄江稿)』『소호당집(韶濩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近韓漢文學에 對한 一考察(權五惇, 人文科學 5)
開化期의 漢文學(閔丙秀, 국어국문학 제68‧69, 국어국문학회, 1975)
寧齋 李建昌과 滄江 金澤榮의 古文觀(金都鍊, 한국학논총 3, 국민대학교, 1980)
창강 김택영론(오윤희, 동국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 1981)
김택영전연구(이상필, 한국정신문화연구원부설한국학대학원석사논문, 1982)

[집필자]

고경식(高敬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