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운징(李雲徵)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C6B4C9D5B1645X0
자(字)백우(伯雨)
호(號)만연(曼衍)
생년1645(인조 23)
졸년1717(숙종 43)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이운징(李雲徵)
1645년(인조 23)∼1717년(숙종 4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백우(伯雨), 호는 만연(曼衍). 본관은 전주(全州)(주1)
본관
손자 이인좌(李麟佐)를 참고하여 본관을 광주(廣州)에서 전주(全州)로 수정함.
.

증조부는 이몽상(李夢祥)이고, 조부는 이정신(李廷臣)이며, 부친은 이응시(李應蓍)(주2)
가족
부 이응시(李應蓍)의 문과방목을 참고하여 부, 조부, 증조부를 추가함.
이다. 1728년(영조 4) 무신병란을 일으킨 이인좌(李麟佐)는 손자이다.

1678년(숙종 4) 문재(文才)와 조행(操行)이 뛰어나고 지려(智慮)와 용력(勇力)이 뛰어나 오정위(吳挺緯)이원정(李元禎)의 추천으로 곧바로 6품에 발탁되어 호남수령(守令)직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호남수령으로 있으면서 잘 다스린 공적이 인정되어 영의정 허적(許積)의 추천으로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에 임명되었다. 이때 숙종이운징이 쓸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하여 남쪽 고을에서 발탁하여 임명한 것이니 모름지기 직무에 충실할 것을 특별히 유시하였다.

그러나 1680년(숙종 6)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섬으로 유배당하였다. 1689년(숙종 15) 사헌부장령으로 다시 등용되어 집의승지를 거쳐 강원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형 이의징(李義徵)과 악한 짓을 같이 하여 권세를 탐내고 화를 만들기를 좋아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 귀양조치 당하였다가, 1699년(숙종 25)에 관직이 삭탈된채 시골로 보내어졌으며, 1710년(숙종 36)에 유배가 해제되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3-19"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후손으로"를 삭제함. 이준경은 광주이씨(廣州李氏)임.[수정자: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