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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시(李應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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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군서(君瑞)
호(號)취죽헌(翠竹軒)
호(號)죽창(竹窓)
생년1594(선조 27)
졸년1660(현종 1)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정신(李廷臣)

[상세내용]

이응시(李應蓍)
1594년(선조 27)∼1660년(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서(君瑞), 호는 취죽헌(翠竹軒)죽창(竹窓).

세종의 7대손이며, 이정신(李廷臣)의 아들이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43년 장령이 되고, 1645년 동지사(冬至使)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뒤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여색을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왕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 직산에 이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사간교리승지대사성도승지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1652년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54년 함경도관찰사로 파견되었는데, 도내의 궁벽진 곳을 스스로 돌아보고 미비점을 계(啓)로 올림으로써 왕으로부터 표리(表裏)일습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1655년 도민이 청나라에 월경하여 살인한 사건으로 청나라의 항의를 받고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승지에 기용되고, 1658년 대사간, 이듬해 이조참판으로 승진되었다. 효종이 죽자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생활이 검소하며 관직에 충실하여 사람들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조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재현(才賢)을 제대로 천거하지 못한다 하여 식자들로부터 비난을 들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최진옥(崔珍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