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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봉주(洪鳳周){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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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866(고종 3)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종교 > 천주교인
홍재영(洪梓榮)
정소사(丁召史)
조부홍낙민(洪樂民)
출신지충청남도 예산

[상세내용]

홍봉주(洪鳳周)
미상∼1866년(고종 3). 천주교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충청남도 예산 출신.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홍낙민(洪樂民)의 손자이며, 기해박해 때 순교한 홍재영(洪梓榮)의 아들이다. 어머니 정소사(丁召史)는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며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정약종(丁若鍾)의 맏형인 홍약현(洪若鉉)의 딸로 기해박해 때 남편과 함께 순교하였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은 그는 1852년(철종 3) 메스트르(Maistre, J. M.)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서울 전동에 있는 이군심(李君心)의 집에 기거하게 하면서 전교활동을 도왔다.

1855년 2월 메스트르 신부의 명을 받고 선편으로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조선교구의 제4대 주교로 임명된 베르뇌(Berneux, S. F., 張敬一) 주교를 만나, 그와 푸르티에(Pourthie', J. A.) 신부, 그리고 프티니콜라(Petitnicolas, M. A.) 신부를 서울까지 인도하여, 태평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주교의 포교활동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65년 러시아의 국경침범사건으로 정국이 시끄러워지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종교의 자유도 얻고 자신의 입신출세도 도모할 목적으로 김면호(金冕浩)이유일(李惟一) 등과 상의하여, 러시아 사람을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영국과 조약을 맺는 데 있으며, 이 조약을 맺는 데는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주교를 통해서 교섭하는 것이 좋다는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趙基晉)을 통해서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이 없자 천주교인으로 관직에 있는 승지 남종삼(南鍾三)에게 그사이의 경위를 설명하고 방아책을 다시 청원하도록 종용하였다. 이에 남종삼은 자신이 직접 작성한 청원서를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주교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순교하는 병인박해를 몰고 왔다.

186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와 함께 잡혀, 3월 7일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던 날, 남종삼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러나 파리외방전교회 측에서 밝힌 그의 순교 사실에 대한 의혹 때문에 병인박해 순교자 26위시복 후보자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참고문헌]

日省錄
韓國天主敎會의 歷史(崔奭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Histoire de l’ glise de Core(Dallet, C. C., Paris, 1874)

[집필자]

최석우(崔奭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