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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린(閔泳璘)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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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영기(泳琦)
자(字)기옥(奇玉)
생년1873(고종 10)
졸년1932(일제강점)
시대항일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태호(閔台鎬)
생부민술호(閔述鎬)
출신지서울

[상세내용]

민영린(閔泳璘)
1873년(고종 10)∼1932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초명은 민영기(閔泳琦), 자는 기옥(奇玉). 서울 출신.

민술호(閔述鎬)의 아들로,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민태호(閔台鎬)에게 입양되었으며, 순종비인 순명황후(純明皇后)의 오빠이다.

189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에 임명되고 이듬해 시강원 겸 문학필선(弼善)을 거쳐 1892년 이조정랑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898년 비서감(祕書監)비서승 겸 장례(祕書丞兼掌禮), 이어서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궁내부협판,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를 역임, 1900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를 지냈다.

1904년 예식원부장(禮式院副長)내장원감독(內藏院監督)을 거쳐 다시 동지돈녕부사가 되었으며 특명전권공사를 겸임, 일본에 다녀왔다.

그뒤 비서원경(祕書院卿)궁내부특진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907년 시강원첨사(侍講院詹事)에 재임중 조동윤(趙東潤) 등 15인과 함께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궁내성 사무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해 11월 규장각제학에 임명되고 이어 장례원경(掌禮院卿)지돈녕부사를 역임하였다.

1910년 일제에 강제 합병당할 때 일본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와 12만원의 은사금을 받았다. 그해 이기동(李基東)과 함께 『제국신문』을 인수하려고 하였으나 사장 정운복(鄭雲復)과의 충돌로 실패하였다. 뒤에 작위를 취소당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舊韓國官報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總督府印刷局, 1910)

[집필자]

이완재(李完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