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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순(王性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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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왕지순(王之淳)
자(字)원초(原初)
호(號)경암(敬菴)
생년1868(고종 5)
졸년1923
시대조선후기
본관개성(開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왕정린(王庭麟)
조부왕헌주(王憲周)
출신지개성(開城)

[상세내용]

왕성순(王性淳)
1868년(고종 5)∼1923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원초(原初), 호는 우아당(尤雅堂)경암(敬菴).

조부는 왕헌주(王憲周)이며, 생조부는 왕이필(王爾弼)이다. 1869년(고종 6) 정월 21일에 개성(開城)에서 왕정린(王庭麟)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정린개성분감역(分監役)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3품에 올랐다. 왕정린의 전처는 김해(金海) 김창화(金昌華)의 딸이었으나 자식이 없이 죽었으며, 후처는 김해 김처형(金處瀅)의 딸로 왕성순의 모친이다. 그녀는 왕성요(王性堯), 왕성순(王性淳), 왕성연(王性淵)의 3형제를 두었는데, 왕성연은 1894년(고종 31) 갑오식년사마시(甲午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왕성순전주 이용겸(李容謙)의 딸과 결혼하였지만, 이씨 부인은 자식이 없이 1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 후 하음 봉학연(奉學淵)의 딸과 결혼하여 왕한종(王翰宗), 왕한승(王翰承), 왕한영(王翰英)의 세 아들과 우상언(禹相彦)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왕성순은 19세인 1887년(고종 24)에 정해별시문과(丁亥別試文科)에 병과 16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고, 임금께 소대(召對)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벼슬에 오른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겠노라고 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창강(蒼江) 김택영(金澤榮)을 따라 문장을 배웠다. 그러나 자신의 학문이 문학에 치우친 것을 반성하고 경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하면서 경암(敬菴)이란 자호를 짓기도 하였다. 그 사이에 조정으로부터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집의(執義)가 내려지고, 1906년에는 고려의 후예라는 이유로 특별히 홍문관시강(弘文館侍講)까지 내려졌으나 모두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왕성순은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에 김택영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도 망명할 것을 내비쳤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김택영의 저술인 『창강고(蒼江稿)』도기(屠寄)에 의해 간행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도 또한 중국으로 가서 살고자 했지만, 아버지가 연로하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중국으로 떠나지 못한 마음을 달래며 조선의 문적 편간에 관심을 갖고, 『조선오현문초(朝鮮五賢文抄)』『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를 간행하였다.

1922년에 왕성순김택영에게 편지를 보내 『고려사(高麗史)』의 개수를 권하였다. 김택영왕성순의 권유로 『신고려사(新高麗史)』를 지었는데, 왕성순은 끝내 그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55세의 나이로 1923년에 숨을 거두었다.

왕성순김택영, 조긍섭(趙兢燮), 황원(黃瑗), 왕수환(王粹煥), 이건승(李建昇), 정인보(鄭寅普) 등 주요 지식인을 포함하여 이기소(李箕紹), 여사훈(呂士薰), 최성좌(崔性佐), 진중선(秦仲善), 임유서(林有瑞) 등의 송도(松都) 지식인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학문은 김택영의 학문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들은 서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학문적, 인간적 토론을 통하여 당대지성사에서 소외된 송도학맥(松都學脈)을 수면위로 부상시켰다. 김택영의 편간활동에 왕성순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일군의 지식인 집단을 형성하였다.

[참고문헌]

麗韓十家文抄
朝鮮五賢文抄
閨門軌範
尤雅堂鼓
韶濩堂全集
韓國歷代小史
新高慮史
松都人物志

[집필자]

이관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