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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林炳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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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옥(中玉)
호(號)돈헌(遯軒)
생년1851(철종 2)
졸년1916
시대조선후기
본관평택(平澤)
활동분야호국 > 의병
임용래(林榕來)
출신지전라북도 옥구
묘소회문산(回文山)
저서『돈헌문집』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임병찬(林炳瓚)
1851년(철종 2)∼1916년. 한말의 의병.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전라북도 옥구 출신. 임용래(林榕來)의 아들이다.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11월에 1,000냥을 내어 구휼하고, 이어 3,000냥과 조(租) 70석을 내어 휼민(恤民)하고, 다음해 징세(徵稅)할 때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그리하여 1899년 호남의 선비들이 그의 공을 추천하여, 2월에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오위장(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그뒤에도 휼민을 잘하였으므로 7월에 낙안군수(樂安郡守)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906년 2월에는 최익현(崔益鉉)태인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초모(招募)‧군량‧연병(鍊兵)의 책임을 맡아 홍주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연락하면서 태인정읍순창곡성 등을 쳐서 관곡을 군량으로 충당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같은해 6월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은거하면서 재거(再擧)를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의 밀조(密詔)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 격문을 보내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하여 12월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하여 대한독립의군부로 만들었다. 그는 총사령으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이하 대소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여기에서는 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주지시키며, 외국에 대해서는 일제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일제를 일시에 구축하려는 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5월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잡힌 것이 계기가 되어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이 드러나 그도 잡혔다. 옥중에서 세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다.

1916년 5월 유배지에서 병사하였다. 묘지는 회문산(回文山)에 있으며, 하청(河淸)에 사당이 건립되어 최익현과 함께 배향되었다. 그 앞에 창의기념비가 있다.

저서로는 『돈헌문집』이 있으며, 그 중에 수록된 「돈헌문답기(遯軒問答記)」는 태인의거 후 잡혀 취조당할 때의 기록과 1908년 5월 천안에서 세 차례에 걸친 일본헌병대장과 문답하던 기록으로서, 의병운동사 및 사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梅泉野錄
騎驢隨筆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29)
武裝獨立運動秘史(蔡根植, 大韓民國公報處, 1949)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愛國同志援護會, 1956)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韓國獨立史(金承學, 統一問題硏究會, 1972)

[집필자]

박성수(朴成壽)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