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원(鄭世源)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C138C6D0B1856X0 |
생년 | 1856(철종 7)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영일(迎日)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해륜(鄭海崙) |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세원(鄭世源)
1856년(철종 7)∼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예문관제학 정해륜(鄭海崙)의 아들이다.
1883년(고종 20) 진사로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던 중 춘도기(春到記)에 시로써 수석을 차지하여 곧바로 전시에 나아갈 자격을 얻고, 곧이어 임오군란으로 1년 미루어져 이해에 실시된 식년문과에 급제, 관로에 나아갔다.
세자시강원과 홍문관‧예문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889년 한림소시(翰林召試)에 합격하였다. 다시 세자시강원 겸 필선을 지낸 뒤 1890년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는 증광감시의 시관을 맡았고,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894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97년 비서승(祕書丞)으로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국상에서의 노고로 승진하여 이듬해 중추원1등의관에 임명되고, 칙임관4등이 서하되었다.
안동군수로 재임중이던 1899년 평안남도관찰사로 전임되어 1년 뒤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업적이 좋지 못하여 징계를 받았다가 곧 특별히 징계를 면제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1901년부터 1902년까지는 종2품의 지위에 있으면서 주로 궁내부특진관으로서 관직생활을 하였다.
예문관제학 정해륜(鄭海崙)의 아들이다.
1883년(고종 20) 진사로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던 중 춘도기(春到記)에 시로써 수석을 차지하여 곧바로 전시에 나아갈 자격을 얻고, 곧이어 임오군란으로 1년 미루어져 이해에 실시된 식년문과에 급제, 관로에 나아갔다.
세자시강원과 홍문관‧예문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889년 한림소시(翰林召試)에 합격하였다. 다시 세자시강원 겸 필선을 지낸 뒤 1890년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는 증광감시의 시관을 맡았고,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894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97년 비서승(祕書丞)으로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국상에서의 노고로 승진하여 이듬해 중추원1등의관에 임명되고, 칙임관4등이 서하되었다.
안동군수로 재임중이던 1899년 평안남도관찰사로 전임되어 1년 뒤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업적이 좋지 못하여 징계를 받았다가 곧 특별히 징계를 면제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1901년부터 1902년까지는 종2품의 지위에 있으면서 주로 궁내부특진관으로서 관직생활을 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國朝榜目
[집필자]
오종록(吳宗祿)
명 : "세원(世源)"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