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洪英植)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64DC601C2DDB1855X0 |
자(字) | 중육(仲育) |
호(號) | 금석(琴石) |
시호(諡號) | 충민(忠愍) |
생년 | 1855(철종 6) |
졸년 | 1884(고종 2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남양(南陽[唐])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홍순목(洪淳穆) |
출신지 | 서울 |

[상세내용]
홍영식(洪英植)
1855년(철종 6)∼1884년(고종 21).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서울 출신.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아들이다.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개항 직후 박규수가 죽자 중인 의관인 유홍기(劉鴻基: 호는 大致)의 지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73년(고종 1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규장각의 정자(正字)‧대교(待敎)‧직각(直閣) 등을 역임하였다. 민영익(閔泳翊)과도 가깝게 지냈으며 1881년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조사(朝士)로 선발되어 일본의 육군을 주로하여 시찰, 『일본육군총제(日本陸軍總制)』와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을 작성하였다.
귀국 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가 되었으며, 민영익과 함께 총무국을 담당하였다.
1882년 홍문관부제학과 규장각직제학에 임명되었고, 부호군이 되어 임오군란의 수습에도 활약하였다. 이어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參議統理內務衙門事務)‧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를 역임하고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냈다.
1883년 6월에는 그 전해에 체결된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에 따른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하여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을 다녀와, 11월에 복명(復命)하였다. 개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부터 개화당(開化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것 같다.
1884년에는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로 임명되었다가, 곧 협판군국사무로 전임되고,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해 3월 27일에는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겸임하여 우정국의 설립에 전력하였고, 10월 17일의 우정국의 개국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 등 개화당과 일본세력과 모의하여 일어난 갑신정변은 일본세력에 의지하여 친청온건개화파(親淸穩健開化派), 즉 이른바 사대당(事大黨)을 제거하고, 개화당 정부의 수립을 시도한 것이었다. 홍영식은 처음에 신정부의 좌우영사 겸 우포장(左右營使兼右捕將)에 제수되었다가, 곧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3일 만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개화당 지도층의 대부분이 일본에 망명한 것과는 달리,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국왕을 호위하다가 우리 군에게 살해되었고, 아버지 홍순목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살하였다.
그는 문벌도 좋았고 성품도 온후하여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원되었으며,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대제학(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奎章閣大提學)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아들이다.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개항 직후 박규수가 죽자 중인 의관인 유홍기(劉鴻基: 호는 大致)의 지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73년(고종 1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규장각의 정자(正字)‧대교(待敎)‧직각(直閣) 등을 역임하였다. 민영익(閔泳翊)과도 가깝게 지냈으며 1881년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조사(朝士)로 선발되어 일본의 육군을 주로하여 시찰, 『일본육군총제(日本陸軍總制)』와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을 작성하였다.
귀국 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가 되었으며, 민영익과 함께 총무국을 담당하였다.
1882년 홍문관부제학과 규장각직제학에 임명되었고, 부호군이 되어 임오군란의 수습에도 활약하였다. 이어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參議統理內務衙門事務)‧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를 역임하고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냈다.
1883년 6월에는 그 전해에 체결된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에 따른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하여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을 다녀와, 11월에 복명(復命)하였다. 개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부터 개화당(開化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것 같다.
1884년에는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로 임명되었다가, 곧 협판군국사무로 전임되고,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해 3월 27일에는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겸임하여 우정국의 설립에 전력하였고, 10월 17일의 우정국의 개국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 등 개화당과 일본세력과 모의하여 일어난 갑신정변은 일본세력에 의지하여 친청온건개화파(親淸穩健開化派), 즉 이른바 사대당(事大黨)을 제거하고, 개화당 정부의 수립을 시도한 것이었다. 홍영식은 처음에 신정부의 좌우영사 겸 우포장(左右營使兼右捕將)에 제수되었다가, 곧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3일 만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개화당 지도층의 대부분이 일본에 망명한 것과는 달리,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국왕을 호위하다가 우리 군에게 살해되었고, 아버지 홍순목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살하였다.
그는 문벌도 좋았고 성품도 온후하여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원되었으며,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대제학(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奎章閣大提學)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참고문헌]
日省錄
甲申日錄
龍湖間錄
甲申日錄
龍湖間錄
[집필자]
최기영(崔起榮)
명 : "영식(英植)"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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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2-04-10 | 朝鮮王朝實錄을 참고하여 "좌의정"을 "우의정"으로, "청군에게 살해되었고"를 "우리 군에게 살해되었고"로 수정함.[수정자: 이재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