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조(鄭漢朝)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D55CC870B1835X0 |
자(字) | 유량(幼良) |
생년 | 1835(헌종 1) |
졸년 | 1917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동래(東萊)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세화(鄭世華) |
출신지 | 서울 |

[상세내용]
정한조(鄭漢朝)
1835년(헌종 1)∼1917년. 조선 말기의 문신‧친일관료.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량(幼良). 서울 출신. 부사 정세화(鄭世華)의 아들이다.
아버지로부터 칠서(七書)를 배운 뒤 1861년(철종 12) 정시문과에 급제, 이듬해 초에 홍문관에 등용되었으며, 그뒤 승정원의 가주서를 지냈다.
1898년 비서원승(祕書院丞)을 지냈고, 그뒤 판서를 여러 차례 역임하였으며, 장례원경(掌禮院卿)‧내장원경(內藏院卿)‧의정부참찬‧문관전고위원(文官銓考委員), 각 부의 관제조사위원, 내각의 부동산법조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고종 때는 특히 신임을 받아 대기(大機)에 간여한 바 있는 중신이 되었다.
그밖에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네번이나 역임하였으며, 평안도관찰사, 그뒤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한운야학(閑雲野鶴)으로 세월을 보냈으나 1910년 나라를 일본에 강제로 빼앗겼을 때 그는 회유차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이라는 작위를 받아 친일파라는 오명을 남겼다.
아버지로부터 칠서(七書)를 배운 뒤 1861년(철종 12) 정시문과에 급제, 이듬해 초에 홍문관에 등용되었으며, 그뒤 승정원의 가주서를 지냈다.
1898년 비서원승(祕書院丞)을 지냈고, 그뒤 판서를 여러 차례 역임하였으며, 장례원경(掌禮院卿)‧내장원경(內藏院卿)‧의정부참찬‧문관전고위원(文官銓考委員), 각 부의 관제조사위원, 내각의 부동산법조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고종 때는 특히 신임을 받아 대기(大機)에 간여한 바 있는 중신이 되었다.
그밖에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네번이나 역임하였으며, 평안도관찰사, 그뒤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한운야학(閑雲野鶴)으로 세월을 보냈으나 1910년 나라를 일본에 강제로 빼앗겼을 때 그는 회유차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이라는 작위를 받아 친일파라는 오명을 남겼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日省錄
文品案
梅泉野錄
朝鮮貴族列傳
高宗實錄
日省錄
文品案
梅泉野錄
朝鮮貴族列傳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대표명 | 정한조(鄭漢朝) |
성명 | 정한조(鄭漢朝) |
성명 : "정한조(鄭漢朝)"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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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